혁신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최고의 밴드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영국 헤비메탈 밴드인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를 꼽을 것이다. 귀를 찢을 듯한 현란한 전자기타 연주, 심장을 두드리는 격렬한 드럼 소리, 그리고 ‘메탈 갓Metal God’이라는 수식어처럼 날카로운 초고음의 보컬이 어우러진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은 대학 시절 나에게 단순한 선율을 넘어 눈 앞의 현실을 타개해 나갈 깊은 용기를 안겨주었다.
주다스 프리스트 음악의 정점은 단연 1980년 발표한 여섯번째 앨범인 「브리티시 스틸British Steel」이다. 지금도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앨범의 대표곡이 바로 ‘브레이킹 더 로Breaking The Law’이다. 브레이킹 더 로는 틀을 깨부수라는 뜻이다. 법대생 시절 부터 기존의 룰을 뒤엎자는 노래에 매료된 걸 보면 2012년 ‘혁신 가들의 로펌’이라는 슬로건 아래 규제개혁을 목표로 하는 IT 전문 로펌 ‘테크앤로TEK & LAW’를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2016년 1월 개최된 다보스 포럼의 핵심 의제는 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였다. 4차 산업혁명이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과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하는 기술혁명으로 2020년 이후 꽃피게 될 것이라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우리의 준비는 미흡하기만하다. 4차산업혁명의기반이되는인터넷산업에대한그간 의 대응만 봐도 그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터넷 산업이 태동하던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전자상거래와 포털사이트의 발달로 인터넷이 북적대기 시작하던 무렵에 명예훼손, 전자상거래 사기, 개인정보 거래 등 소위 인터넷 역기능이 함께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부는 인터넷 산업의 역기능을 통제하겠다며 온라인 규제 도입에 착수했다. 소위 인터넷 기업 들에게 역기능을 방지할 법적인 행위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인터넷 산업의 역기능은 오프라인의 불법이 온라인에 그대로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화 전반에 남아 있는 불법 풍조에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인터넷 기업들이 장을 열었으니 책임도 지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도 정부의 역기능 규제 정책은 인터넷 기업들에게 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범죄를 막을 의무는 국가에게 있음에도 민간 기업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행정편의적 정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인터넷 산업의 성적표는 초라한 수준이다.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창업한 인터넷 기업 중에 글 로벌 대기업으로 발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인터넷 대기업인 네이버, 카카오, 옥션, 엔씨소 프트 등은 1990년대에 창업해 선도기업이 된 덕분에 이후 불어 닥친 규제를 이겨내고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나머지 기업들은 정부의 이중삼중 규제와 경쟁의 치열함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나라 인터넷 산업의 초라한 성적표는 그간 정부가 인터넷 산업의 미래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기반을 둔 범국가적 정책을 연구하지 않고 그때 그때 인터넷산업에 대한 정부의 권한강화를 위한 국내형 규제를 도입해온 지난 20년의 인과응보다. 문제는 앞으로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인터넷 기업들이 전통산업에 진출하는 O2OOnline to Offline 시장만 봐도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심각한 박해에 시달리 고 있다. 전통산업을 지지하는 정부 부처들은 기존 시장 질서에 도전장을 내민 혁신기업들의 편에 서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로 임해 결국 기득권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반면 미국과 중국은 다른 선택을 했다. 미국은 인터넷산업에 대한 규제를 잘 도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터넷 사업자는 그 이용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는 단순 전달자Carrier로 보고 규제를 배제하는 입장에 서 왔다. 연방의회에서 입법을 워낙 신중하게 하고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이 없다 보니 새로운 현상에 대한 규제는 기본적으로 ‘관망Wait and See’ 정책을 취한다. 이는 문제점이 두드러질 때까지 섣불리 규제하지 않는 입법 문화로 이어진다. 중국도 절대 해서는 안되는 몇 가지만 법으로 규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는 ‘선 허용 후 규제’ 정책을 펼치고있다. 중국공산당의 선택은 인터넷산업 육성으로 미국 기업들의 서비스 침공에 맞서 중국 인민들의 산업과 데이터를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글로벌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을 줄지어 탄생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터넷 포털과 검색광고 시장을 선점한 네이버와 카카오 정도가 이들 글로벌 기업들에 대항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오래전부터 정부 관료들에게 경고해 온 이야기다. 인터넷 플랫 폼 사업자를 쥐고 흔드는 규제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책임이 사업자에게만 돌아간다. 시민들의 책임의식이 높아질 기회는 사라진다. 그 결과 사이버 역기능은 계속되고 다시 플랫폼 규제가 강화되어 스타트업이 자생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마디로 생태계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인터넷 산업은 전방위 산업을 지배하는 운영체제로 변신하고 있다. 국내 인터넷 기업들의 실패는 글로벌 인터넷 플랫폼에 의한 국내 컨텐츠의 해외 이전을 가져오고 우리 국민들의 개인정보 해외 이전으로 이어지며, 결국 국부유출로 국력의 급속한 쇠퇴와 해외종속을 초래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에서 생산되는 컨텐츠의 상당한 비중이 해외 인터넷 기업들의 해외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들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들의 이용기록, 즉 개인정보도 이들 해외 인터넷 기업들에 의해 장악된다. 이 컨텐츠와 개인정보의 장악은 결국 광고비, 서비스 이용료 등 국부의 해외유출로 이어진다. 이대로 가면 우리 나라는 정보와 돈을 글로벌 사업자에게 다 뺏기고 국내에 정보가 부재하는 정보진공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정보 좀비 국가’라고 부른다.
정보의 국외이탈은 국가의 정보 주권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인터넷 산업의 우열에 따른 정보제국주의 현상이 이미 시작되었 다고 보고 있다. 정보제국주의 시대에 정보에 대한 주권을 잃게 된 국가는 정보 식민지에 불과하다. 정보진공상태에 빠진 우리나라의 인터넷을 해외와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이 끊기면 바로 국가적 블랙아웃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터넷산업을 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경쟁력 있는 경제체계를 만드는 수 밖에 없다. 결국 정부가 할 일은 서비스 산업과 기술을 가로막는 불합리한 규제, 그 중에서도 플랫폼 사업자를 옥죄는 규제들을 대폭 혁파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기업의 몫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술 진보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 등 자연법칙의 제약에 의해 인간이 고통받아온 기아와 노동으로부터 해방돼 온 역사라 할 만 하다. 이러한 해방의 역사는 오늘날 급진전된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은 풍족해 졌으며 인류 지식과 인식의 지평은 획기적으로 넓어졌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모든 지역, 계층, 세대를 행복하게 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마부는 일자리를 잃었고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으로 타자수 역시 전문성을 잃었으며 우버의 등장으로 택시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누군가는 기술 진보의 이득이 훨씬 크므로 부작용은 무시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설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부작용이 인간존엄을 저해한다면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의심해봐야 한다는 입장에 설 것이다. 기술의 진보는 양면적 속성에서 비롯된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보사회의 법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사명이 있 다. 기술의 진보를 고양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전통적 기본권 을 지켜내야 하는 난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이룰 것인가? 법은 경험에 기반을 둔 사회 다수의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 사회의 다수의 합의란 결국 기득권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법은 기득권을 지키는 보수성을 본질로 사회를 규율하므로 ‘점진적 개혁’을 넘어설 수 없다. 반면 기술은 확립된 이론을 깨거나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이른바 ‘파괴적 혁신’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기술의 본질은 진 보성에 있다.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세력은 기득권을 흔들고 기득권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법을 동원해온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때로 법은 기술을 선택해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술이 법을 무찔러 새로운 기득권을 얻은 역사가 인류사회의 지배와 혁명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의 글로벌 경제전쟁시대에는 파괴적 혁신을 잘 달성하는 국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지배적 승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법과 기술을 어떻게 다룰지가 관건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드러나는 전통산업과 혁신산업의 충돌적 현상을 선제적으로 간섭하거나 규제하는 것은 기술발전을 저해함으로서 경제전쟁에서 우위에 서기 어렵다는 문제를 낳는다.
핀테크, 헬스케어 테크, 카테크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융합산업은 혁신적인 인터넷 기업들이 박차고 나가서 글로벌 회사들과 특허전쟁을 벌여야 하는 산업이다. 오프라인형 규제를 온라인형 규제로 바꾸는 전면적인 규제 변혁regulative transformation이 시급하다. 규제 변혁이란 규제의 플랫폼을 온라인 시대에 맞게 바꾸 는 것으로 몇 가지 마이너한 규제 해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모바일 시대에는 오프라인 시대와 다른 산업정책을 가져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데이터 테크놀로지DT로 무장한 글로벌 인터넷 대기업들이 오프라인 산업분야를 조만간 휩쓸게 될 것이 명백하다.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규제로 상징되는 구체제ancien regime는 혁신의 편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역사의 명제 앞에 굴복해선 안된다. 우리는 중국처럼 보호무역주의를 취할 힘이 없다. 유럽연합EU은 이미 때를 많이 놓쳐서 개인정보 해외 이전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공정거래법을 내세워 천문학적 과징금을 부과하는 보호무역정책으로 미국 기업들과 법률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과 싸울 입장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정부가 획기적인 규제 변혁에 나서는 것이다.
역사상 새로운 위험 요소는 불안전하더라도 금지하지 않고 이용하면서 경험을 쌓아 안전한 방법을 발전시킨 나라가 결국 새로운 산업혁명의 승자가 됐다. 증기기관, 자동차, 원자력발전소가 그렇다. 안전유리가 발명되기 전에 자동차는 탑승자 살인무기와 다름없었다. 기득권층과 충돌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측면을 충분히 경험하고 사회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자율적 조정이 작동하지 않음이 명백해질 때 정부나 국회가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법 정책이 운용돼야 한다. 기술의 진보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던 산업사회에서는 기술과 사회진보의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른바 테크노크라트로 불리는 지배 엘리트가 독점적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도는 상당 부분 효과적이기도 해서 기술에 대한 국가리더십을 통해 짧은시간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다. 바로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성공신화가 정보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리라는 믿음은 과욕인 동시에 오산이다. 우리는 미래 예측은 고사하 고 현재 상황의 정확한 파악마저 힘든 대규모 정보의 홍수시대와 1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속에 종전 시대의 낡은 규제가 새로운 혁신엘리트들의 시도를 규제하는 상황에 빠지고 있는데도 정부의 움직인은 미온적이다.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기다림과 자율 그리고 엄격한 책임의 균형미학이 법의 운용 철학이 되어야 한다.
한국 경제가 디지털 마켓으로 변신하지 않고서는 4차 정보혁명을 주도할 수 없다. 디지털 마켓으로 전환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규제 장벽이다. 피지컬 마켓에서 기득권자인 전통산업자들과 정부가 규제장벽을 지탱하고 있다. 규제장벽 철폐를 통해 미래 한국의 성장동력인 디지털 마켓으로의 변신을 서둘러야 한다.
법률은 기득권을 위한 것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법률은 없다. 미래세대의 등장을 원한다면 기득권을 보호하는 법률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물론 전통과 혁신의 법률 전쟁은 역사와 함께해 온 전쟁이라서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젠 전통을 편드는 정부의 변신을 돕는 일도 중요하다.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 정부가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밀도 있는 고찰과 재설계가 필요하다. 대통령 소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사회 각 분야의 산업에 대한 재설계를 추진하고 있으나, 정작 그 변혁을 주도해야 할 정부의 디지털 변혁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사전적 규제시스템의 사후규제 시스템으로 변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고 있음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일이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법률 이슈를 살펴보고 우리나라가 글로벌 플랫폼 전쟁에서 승자가 될 방법을 모색해보고 있다. 아직 미흡한 생각이지만 규제의 본질적 변화와 정부의 디지털 변혁을 위한 위한 논의의 첫발을 뗀다는 마음으로 부족한 글들을 모으고 다듬어 여러분께 내놓게 됐다. 아 무쪼록 이 책이 정부와 기업과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성공적 대응을 위한 대안을 고민하고 찾아가는데 단초 역할을 하길 간절히 바란다.
2018년 7월 구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