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眞空妙有(진공묘유)

양동이에 채워진 물고기를 비우며

by 태공

아이들이 농장에 놀러오면 개천에서 다슬기나 작은 물고기를 잡으며 신나게 놉니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죠. 아이들이 흙 묻은 손으로 물살을 가르며 생물을 잡아 양동이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호호 뛰어 놀며, 그 즐거워 하는 모습에 부모들은 사진을 찍으며 재미있게 놀아요.


하지만 돌아갈 시간이 되면, 전 그 양동이를 다시 개울물에 비워야 합니다.

아이들에겐 재미였겠지만, 그 생명들은 그저 유희의 대상이었고,

버려진 채 죽어가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텅 비어진 양동이를 보며,

문득 제 농장 한구석에 쌓인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딱히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쓰겠지”, “누가 버렸을까”, “아깝다”는 마음에

이유도 없이 채워 놓은 물건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지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 삶 전체가 이렇게 채우려고만 하는구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고, 쌓고, 간직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어쩌면 내 방도, 책장도, 내 뱃속조차도…

모두 ‘채움’이라는 열망으로 가득했지요.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비우려 해도, 생각은 저절로 다시 채워집니다.

그래서 호흡에 집중하세요.

다시 생각이 밀려오면, 그것을 인식하고 또 돌아오세요.”


비운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들로부터 ‘돌아오는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가만히 나둬도 채워지는데,

더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그것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내 안을 채우고자 했던 것들—

더 많은 지식, 더 좋은 책, 더 나은 환경, 더 효율적인 무언가들—

모두 ‘쥽쥽’거리며 붙잡고 채워 넣으려 했던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眞空妙有(진공묘유)라는 단어를 접했습니다.


참된 공(空)은 곧 오묘한 유(有)다.

비어 있음 속에야말로 진짜 있음이 드러난다.


불교에서 유래한 이 말이, 제 안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텅 빈 그릇 속에 생명이 담기듯,

비워진 자리에는 더 깊고 진실된 것이 흘러온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문득,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빌립보서 2:6–7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고린도후서 12:9–10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마태복음 5: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씀들이 이해되고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리는, 동양의 지혜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기도 했습니다.


채우려 하지 말고, 비워야 하며.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며.

부요함을 좇기보다, 베풀 줄 알아야 하고.

내 힘을 키우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




요즘 저는 그렇게 살아보려 합니다.

농장의 물건도, 내 마음의 생각도 하나하나 비워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은혜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담을 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우주는 공허한 듯 보이지만,

그 빈 공간조차도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과 에너지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주를 붙들고 움직이는 실재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처럼, 내가 비운 자리에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들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게 됩니다.


비움은 고요함의 시작이자,

충만함의 준비입니다.


오늘도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마음의 그릇을 비워두었으니

당신의 것으로 충만히 채워주소서.”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