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염치 있는 삶의 고귀함
무기고 습격이 5월 21일 오후 1시
이후에
시작됐다고 하는 시민군 측의
주장과 달리
그날 오전부터 이미 무기고 습격이
진행됐다는 기록들이 있다.
정 OO 나주읍 금성 파출소장은
1980년 7월 16일
전남 합동수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00경
난동 분자 4명이 탄
지프차를 선두로
뒤따라 4~50명이 GMC에 분승하고
파출소 앞에 이르러
뒤따라오던 GMC가 파출소 안으로 돌진,
기물을 파괴하고…
전두환 회고록(전두환 회고록 1권, 403p)
지난 인터뷰(이재승 씨 편)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전두환이 나주 파출소 무기고 습격 시간을 21일 오전으로
조작한 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다.
21일 오후 1시 이전 시민군이 무기고를 탈취한 셈이 돼
자위권 차원에서 집단 발포를 하게 됐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전두환은 도경 상황일지를 조작해 무기고 습격 시간을
오전으로 정정하는가 하면,
안병하 국장에게 관리 소홀 죄를 물었다.
이 사실은 지난 2017년 전남지방경찰청이
정밀 조사 후 발간한 5.18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명시된 바 있다.
보안사가 보존하고 있는 ‘전남도경 상황일지’는
집단발포 이전 시간대에 시민에 의한 총기피탈을
기록(인쇄)하고 있으나,
당시 경찰이 보유하고 있지 않던 ‘경찰 장갑차’가
피탈되었다는 등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문서의 불완전성 (생산기관․년도 미기재,
표지와 본문의 내용 상이 등)
무기 피탈 관련 치안본부 감찰기록 및 당시 근무
경찰관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조작된 것으로
판단됨.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2017년 10월, 전남지방경찰청) 보고서 37p 중
제작진은 당시 근무 경찰관을 만나
그때 상황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았다.
80년 5월 나주경찰서 보안과에서 근무하던
청년 경찰 염행조 씨의 실감 나는 증언이
이어졌고, 때론 한숨과 때론 눈물로
당시의 한과 설움을 표출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이 손을 맞잡은 날
나주시청 인근에 살고 있는 염행조 씨를
만났다. 지천에 철쭉이 만발했고,
시민들의 표정은 비현실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PD 무기고가 언제 털렸냐. 상당히 논란이 됐죠.
이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죠.
엄 제가 나주경찰서 상황실 타격대장 직무대리로
오전에 20일 저녁부터 근무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전에 각 지서 전체를
다 확인했습니다. 이상 유무를.
오전에 다 그 보고를 수합을 했었고요.
PD 오전에 타격대장 직무대리를 하시면서
상황을 다 보고받은 거네요?
엄 오전 한 10시가 넘었을 거예요.
그날 상황실장께서 저하고 가장 젊은
동료를 불렀어요.
지금부터 작정 명령을 하달한다고 해요
복창하라고 하더만요.
치안본부장 작전명령이라는 거예요.
저와 그 친구에게 나주를 반으로 나눠서
이 시간부터 경찰 무기를 예비군 대대,
군부대로 빠른 시간 안에 소개를 시켜라.
그 명령을 거기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군청에서 동원된 차량을
저한테 한 대 줬고요,
젊은 동료에겐 경찰 차량을 배정했습니다.
저는 이제 금천, 산포, 남평, 다도, 봉황,
세지, 영산포. 이렇게 해서 나주를 반을
책임을 지고, 그 차를 타고 금천 나주 다리
를 넘어서 10시는 넘었고 11시는 못 되는
시각에 데모대 차량 한 대와 조우했어요.
사람들이 상당히 웅성거렸어요.
그걸 보자, 군청에서 온 차량 기사가
경찰 작업복을 벗어 달라!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요청했어요.
경찰복을 안 벗으면 운행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옷을 벗어 속옷 차림으로
있으니까 잠바를 벗어줬습니다
그 잠바를 입고 비행장 활주로 못 가서
고개를 넘어가는데 데모대 차가
두대 연속으로 오는 거예요.
광주고속 차량이.
어떤 구호를 외치는고 하니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이 석방하라"
금남로에서 들었던 그 구호들입니다.
데모대들이 오기 전에 전체 경찰 무기고를
빨리 소개를 시켜야 하는데..
제일 처음에 금천 지서에 가니까
지서장이 예비군 중대장들하고
함께 있어서 치안본부장 작전명령을
하달한다고 구두로 지시했습니다.
무기를 빨리 대피시켜라.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 나오는데
산포를 가다가 또 데모대 차량을 만났고요.
산포 지서에서도 작전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그리고 다도를 가니까 점심때가 되었어요.
거기에선 경찰 무기를 차에다 실었어요.
봉고형 차량이었습니다.
그 차에 총기, 수류탄, 실탄을 실으니까
가득 차 버렸어요.
PD 말씀을 들어보니까 점심때까지 계속
나주를 돌아다니면서 무기를 대피시켜라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에요.
엄 네 맞아요, 제가 지서를 돌 때마다
경찰청 상황실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 특이사항이 없다고 했습니다.
봉황에서도 사무실로 전화를 했고
그때도 이상이 없었어요.
PD 그때가 몇 시인가요?
엄 그때가 1시가 조금 넘었을 겁니다.
세지 지서를 가니까 시민들 차량이
한번 다녀간 것 같습디다. 그래서 빨리
경찰 무기를 소개를 시켜라. 그때가
1시 반 정도 되었는데 그때도 이상이
없었어요. 사무실로 연락을 해봤을 때.
세지 지서에서 영산포 지서를 나오는
중간이 저희 고향집입니다.
세지 지서장 말씀이
분위기가 6.25 때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잠깐 들러서
부모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되겠어요.
당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내 동생이 집에를 왔는가 안 왔는가도
궁금하고.
그래서 집에 잠깐 들렀다 나왔습니다.
어머니만 뵙고.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가
굉장히 우시더라고.
그 참 눈물이 나올라 한디...(눈가 촉촉)
내가 5.18 얘기는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그래...
그래서 영산포 사거리를 나왔는데,
내 느낌에 무기고가 털린 것 같아.
더 이상 차를 못 가게 막더라고.
뒤에는 경찰 무기가 가득 실어있지.
수류탄이며 실탄이.
그래서 다시 봉황으로 갔는데
시민군 차가 봉황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봉황 지사를 들렀어요.
지사를 들리니까 그때가 한 3시가
좀 넘었죠. 그 시민군 차들이 우리 차를
쫒고 있다는 거야. 봉황 지서에서.
그러니까 빨리 대피를 했으면 좋겠다..
우여곡절 끝에 봉황의 한 전직 면장댁으로
대피한 염 씨는 그곳에 무기를 숨기고
새벽까지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귀가한 후 23일까지 숨어 지내다
오후 2시쯤에서야 경찰서에 복귀했다고 한다.
PD 만약에 무기가 바로 탈취됐다면
바로 보고가 됐겠죠?
엄 나주 무기고에서 먼저 털렸다 하면
5월 21일 오전에 내가 알 수밖에 없어요.
상황 관리를 내가 했으니까.
오전 10시 반 이전까지 내가 다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또 각 지서를 다닐 때마다
경찰서 상황실로 지역 상황 보고 했고,
그리고 그쪽 상황 내가 물어봤었고.
그러니까 1시 반 이전에는
절대무기가 털리지 않았어요.
PD 무기고 개방 시점이 왜곡되는 걸
보고 듣고 하시면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엄 피가 거꾸로 솟을 때가 몇 번 있었어요.
역사는 옳든 그르든 간에 진실 되게 표현이
돼야 해. 사실에 입각해서.
그런데 왜곡을 해도 이렇게 해버리나.
나주 무기 때문에 자위권 발동을 했다.
이건 너무 왜곡된 역사다! 이 말이에요.
나는 지금 내가 인터뷰를 응해도
우리 피디님이 이걸 또 바로 잡아주지
못한다 하면 나는 이제 이 5.18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못 열어요.
그리고 한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어.
산자로서 내 몫을 못했기 때문에.
몇 번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전두환 회고록에
그렇게 나와있다면
이 사람들은 사형을 시켜야 합니다.
PD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나주에서 광주로 파견 가신 셈인데
계엄군이 오기 전까지 상황들은 어땠습니까?
엄 당시 상황은 참 평온했죠.
학생들은 데모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때 전대로 나주경찰서 병력이 갔는데.
13일 날인가 14일 날인가 그래요
그때 우리 부대는 빵과 우유를
못 얻어먹었어.
근데 대학생들이 빵 하고 우유도
갖다 줬어. 경찰들한테.
심지어 민주경찰 봉급 인상하라
그 구호도 학생들이 외쳐줬어요.
나중에 다른 부대들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70년대 말 유신 철폐할 때처럼
격렬하게 한 것도 아니었고.
약간의 소요만 정문 앞에서 있었을 뿐이지
17일까지도 평온했어요.
16일, 박관현 회장이 분수대에 올라와서
이제 신군부에 빌미를 줘선 안 된다.
앞으로는 시위를 안 하겠다.
이렇게 분명히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하고
그날 저녁에 촛불시위를 했는데
대학생들을 비롯해 고등학생,
일부 시민들도 포함해
도청 앞 광장에 상당수가 모였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금남로를 가는데
경찰들은 인도로 못 튀어나가게
양쪽 도로에 서서 촛불시위를
같이 했어요. 같이 갔어. 경찰관들하고.
PD 현장에 계셨습니까?
현장에 있었죠. 동원 가서 올라갔으니까.
PD 평화롭고, 소요 같은 것도 없었다고요?
그때 우리 나주 출신의 선배 한분이
단상에 올라가게 됐어요. 그런데 발언이
약간 과격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끌어내렸어요. 얘기 들어보니까
광주경찰서 가서 즉심을 받았답니다.
내 눈으로 봤는데. 뭘. 그 정도로
서로 자제하고 조심했어요.
PD 계엄군이 투입되고 난 후
18일부터 상황이 바뀌었나요?
많이 바뀌었죠. 18일 되니까
우리 경찰관들은 완전 2순위로 물러났지.
계엄군들이 데모 진압의 1선에 투입됐지.
방석모 쓰고 총을 뒤로 메고, 육모방망이 들고
그 친구들이 15명이나 일개 중대라고 하나.
팔을 높이 올리고 도청 앞에서부터 밀고 가.
그럼 데모대들이 다 밀리고 그랬어요.
1가에서부터 2가 3가로 계속..
그럼 양쪽에서 시민들도 벽돌 던지고 그랬었죠.
PD 진압 방식은 어땠습니까?
엄 진압 방식이 너무 잘못됐어. 경찰하고 계엄 군하고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구먼. 우선 대화로 하려 하고
양쪽이 폭력을 안 써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서 연행하고
방망이로 뚜드려 패서 잡아가려 하고.
그러니까 시민들이 합세를 한 거예요.
방법이 너무 과격해버리니까.
PD 현장에서 보실 땐 어떠셨어요?
엄 내가 시민이었다 해도
나도 같이 참여하고 싶은 생각?
계엄군이 저래선 안 되는데 왜 저런 식으로
데모를 진행하는가.
굉장히 내가 의문이 많이 들었죠.
젊은 경찰관으로서. 그때 제 나이가 29였어요.
결혼한 지 1년 돼서. 일반적 상식으로는 데모를
저렇게 진압해선 안 되는데.
아마 강경진압을 하면 사람들이
그걸 두려워서 데모를 못할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냐.
경찰들이 할 일없이 돼버렸어.
경찰들은 그 사람들 보조 업무야.
옆으로 물러나서 인도 가에 서서
이렇게 그 업무를 했지.
PD 보고 있을 때 괴로우셨겠어요?
그랬지, 전부 다 우리 고향사람들이고.
우리 형제들이고. 그럴 텐데.
경찰관 중에는 데모하는 학생들이나
일반 시민들이 아들도 있을 것이고
친인척도 있을 것이고 그런단 말이에요.
나뿐만 아니라 다 괴로웠었지.
방법이 서툴렀다고 우리들끼리는
그때 당시에 그랬었지.
PD 총기 관련해서 상부에서 혹시 지시가
내려온 건 없었습니까?
진압할 때 어떻게 해라.
그런 얘기는 일체 없었어. 왜 그러냐면
경찰이 무장을 안 했으니까. 총기 무장을.
총기 무장 자체가 없었으니까.
내가 총기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날이
23일이에요. 오후 2시가 넘어서
경찰서를 갔는데,
그때 수사 과장이었던 분이 직위해제를 당했대요.
그리고 오후 5시에 다시 소집을 했어요.
나주 유지들과 총기 회수에 대해서 회의한 거죠.
그다음 오후 6시에 우리 직원들을 현관으로
다 모이라고 하니까 한 30명 좀 넘었어.
강당으로도 안모이고 현관으로 모였는데.
그때는 나는 제일 젊으니까. 그때 5시까지
보초를 섰어.
그때 그 양반이 폭도들이 경찰서를 칩임 하면,
세 번 경고를 하고, 제자리 서라고 경고하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면 하반신 밑으로
반드시! 그 반드시라는 말은
그 양반이 서 너 차례 이상 강조했어요.
23일 오후 6시경에
처음으로 그 명령을 받았었죠.
PD 안병하 국장의 발포 명령 거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엄 그 양반 판단이 진짜 훌륭하고 현명한 판단이죠.
그때 경찰에게 총을 주고 계엄사 지시대로
발포를 하게 됐다면,
무고한 시민들 중에 엄청나게 사상자가 나왔죠.
그 양반 판단이 현명했고.
그때 당시 경찰 분위기로 봐서는
그 양반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많은 경찰들이 발포를 거부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5월 20일 같은 경우에는 상무관에
젊은 기동대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총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계엄군과 맞서겠다고.
그래서 5.18 사건 수습이 끝나고
그 기동대가 해체됐어요.
그 기동대에 있는 친구들이 다 해안 초소(?)로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27일 전남 도청이 수습이 되고
광주경찰서가 분위기가 좀 안 좋았어요.
그때부터 계엄사가 장악해서
저도 나주서에서는 총, 포, 화약을 회수하는 임무가
제 담당이에요. 그래서 매일 계엄 사하고 통화를 해요.
그런데 그때 들리는 말로 광주서에서 100여 명 정도
젊은 경찰관들이 사표를 냈다고 들립디다.
결국, 저도 같은 일을 겪었어요
그때가 6월 15일에서 20일 경이나 될 거예요.
후배가 자기 친구들과 같이 잡혀 와 있어요.
한 명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왔는데,
한 녀석은 목포 시장 임명받았고,
한 놈은 해남군수 임명받았고,
어디 경찰서장 임명받았다고 그래.
그것이 뭣이다냐 하니까.
박관현이 김대중 씨한테 사주를 받아서
이것이 5.18 광주사태이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거예요.
뭐여? 그 녀석을 보니까 머리에서 발끝까지
멍이 다 들었더구먼. 그다음 날 그대로
진술조서를 받은 거예요.
그 자리에서 형사계장 책상을
발로 차 버렸어요.
엊그저께 5.18 때 안 봤냐.
근데 뭔 놈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있냐.
그럼 광주 전남 나주 사람 다 김대중 씨가
내란 일으키자 해서 참여했냐.
말도 안 되는 놈의 짓거리를 하고 있냐고
책상을 차고 악을 쓰니까
옆에 있는 형사가 너만 잘난 놈이냐.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그 말에
이래서는 안 됩니다-하고
악쓰고 가서 그 자리에서 사표 써서
우리 과장한테 줬어요.
그랬더니 과장이,
"인마 경사는 달고 나가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아니 나 이 길로 나가렵니다"
"이 길로 나가야 내가 내 새끼들 대학이라도
가르칠 수 있소"
나는 경찰 조직이 이런다 하면
경찰 조직에 몸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튿날 과장이 또 불러.
과장이 내 사표를 찢어요.
그래서 또 냈어.
오후 퇴근 무렵에.
너희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 해서
그럴 필요가 없소 그랬더니
3일째 된 날 계엄사 방침이라고
너 같은 사람은 사표를 안 받는다 이거예요.
서장이 서울에서 온 사람인데 부릅니다.
서장실로 갔더니 어느 자리로 보내줄 끄나 하고
얘기를 합디다.
정보 형사를 할래, 교통 싸이카 하고 교통 별차가
아주 꽃이었어. 그리 갈라냐고 해서
아니 나는 경찰 조직이 이러면은 안 있으려오..
또 사표를 냈더니 서장이 다시 내 세 번째 사표를
찢어버렸어.
그래서 직장 이탈도 못하고,
출근을 해요. 구속된다고 하니까.
그래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사표를 계속 냈어.
그렇게 결국 이제 야인생활을 했지
나중에 내가 모셨던 과장이
10월에 나를 부럽디다.
너를 어째야쓰까나 하고 내 손을 잡아주더구먼
그때 내가 학원사업을 했는데.
학원 사업도 잘 안 돼.
예체능계 빼놓고는. 너를 어쩌까 나 하고.
말을 못 잊으셨어요.
참 그분은 훌륭하신 분이에요.
23일 날 저녁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 양반을 정말 못 잊는데.
이럴수록 시민들에게 경찰관들의 활동이
보여야 된다. 경찰관들 사기가 이렇게
저하돼서야 되겠냐.
그래서 백차를 타고 같이 나갔죠.
중파 들리고 금파 들리고
영산포 다리를 건너가면서
나한테 무슨 이야길 하냐면,
야 두렵냐. 그 질문을 합디다.
젊은 경찰관이 두려웠죠 밤에.
그때는 유언비어가 흉흉할 때라.
그런데 그 양반 말씀이...
너나 나나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는
틀린 운명이다.
우리는 현재는 경찰관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
그 말씀을 하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도 그분을 생각하면
훌륭한 경찰관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PD 안병하 국장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더뎠던 건
사실이거든요. 훌륭하신 일을 했다면,
어떻게 기억되고 추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엄 그분은 정말 참 공무원이었고 참 경찰관이었죠.
그분이 만에 하나 그 시절에 상황 판단을
잘못하셨다든가, 계엄사의 명령대로 따라버렸다 하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영원히 대한민국 경찰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겠죠.
4.19 때도 한번 경찰이 그 과오를 범해서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오랫동안 샀었는데
그분이 그때 당시에
사격 명령을 내려버렸다고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을 국민들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겠죠.
정말 그분은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PD 그분의 어떤 점들을 우리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엄 항상 경찰은 국민의 편에 서야 된다.
그리고 일부 권력이 아닌, 권력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후세에 널리,
모든 공직자들이 모든 판단은
국민의 편에 서서 판단을 해야 한다.
이 얘기를 꼭 강조하고 싶어요.
PD 안병하 국장이 보여준 행동도 그런 거겠죠?
엄 예 그렇습니다.
그 양반이 그때 당시 어떤 신군부 권력의 편에
섰더라면 출세도 좀 했겠죠.
그러나 국민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끔 막고,
본인은 괴로움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 같은 분이 어떻게 보면 열사죠.
그 시절의 열사예요.
PD 앞으로 시위 질서 유지 등에서
경찰이 취해야 할 자세는?
엄 실정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자들이 옳은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반드시 만들어 줘야 한다.
또 국가 공권력도 그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한 보호도 해야 하지만,
앞으로 데모대들의
시위문화 또한 과격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 시대 그 사람들 과격하지 않았어요.
공수부대들이 과격한 진압을 하니까,
과격하게 나오고 그랬지,
절대 5.18 그때는 과격한 시위 아니었어요.
한편으론 약자들의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은 옳다고 봐요.
단 현 상황에서 보면 과격한 것은 국민들이
다 싫어해요. 그건 과격하게 하라 마라
할 것도 없이 국민들이 다 싫어해.
교통 차단을 오랫동안 하면
시민들이 짜증 나.
그래서 그 사람들 오랫동안 데모 안 해요.
자기주장 안 해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된 거지.
PD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엄 내가 이렇게 우리 피디 님하고 오늘 인터뷰
한 내용을 진작에 산자로서
5.18에 대한 진실을 몸부림이라도
쳐서 밝혔어야 됐는데.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비겁했기도 했고.
젊은 시절엔 우선 먹고살기 위해서
생활 전선에서 바빴고,
그러나 항상 마음의 빚은 지고
갔었습니다.
산자로서의 진실은 꼭 밝혀야 하는데
그 마음의 빚을 정말 내 인터뷰가
역사의 진실을 정리하는 데
조그마한 벽돌 한 장이라고 놔주는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염행조 씨와의 인터뷰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인물들 한 명 한 명에게는 염치가 있었다.
위기 때일수록 경찰의 진면목을 보이자고
후배 경찰관을 다독인 선배 경찰도 있었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후배를
차마 어쩌지 못하고 사표를 몇 번씩 찢어
반려한 상관도 있었다.
염행조 씨 자신 또한 부도덕한 조직의 논리를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내던졌다.
80년 5월의 비극이 일부 권력자들의 야욕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라면,
그나마 시민들을 살리고, 부활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은, 숨은 영웅들이
끝끝내 놓지 않은 양심과 염치의 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