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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r 26. 2018

동시대 한국 창작춤의 색깔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

2018년 3월 15~17일 | 국립극장 달오름


흔히 ‘한국무용’이라 부르는 장르는 두 종류의 춤을 내포한다. 첫째는 장르로서의 한국무용, 즉 한국의 전통무용과 민속무용. 그리고 둘째는 ‘한국 창작무용’이라 불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춤이다. 한국무용의 두 번째 정의에 집중해 살펴볼 때 최근 이 신(scene)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문제는 ‘안무가’에 관한 것이다. ‘한국무용’의 어법을 잘 알면서, 동시대의 ‘한국 창작무용’을 만들 수 있는 안무가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전통의 현대화’ 기치 아래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창작춤을 만들고 있는 국립무용단에게도 이러한 부분은 오랜 고민이었을 것이다. ‘넥스트 스텝’은 ‘국립무용단 젊은 창작 프로젝트’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이러한 문제를 적극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다. 단원 가운데 세 사람이 이번 프로젝트의 안무가로 이름을 올렸다.


‘어;린 봄’ (c)국립극장


김병조 안무 ‘어;린 봄’ 

김병조의 ‘어;린 봄’이 공연의 막을 열었다. 대학 시절 발레를 전공했고 현재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재직해 있으며, 휴먼스탕스 아트그룹이라는 자신만의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는 만큼 대학로나 예술의전당이 아닌, 국립극장 무대에서 보여줄 작품이 더욱 궁금해졌다. 작품은 각 나이대의 무용수가 느끼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그 삶은 예술가의 보편적인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기에, 대상을 ‘무용수’라기보다 ‘국립예술단체의 단원’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싶다.


노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듯 꽹과리를 두드리며 무대를 누빈다. 자신의 후배, 혹은 자식에게 굴신에서부터 발동작 하나까지 천천히 가르친다. 두루마기와 갓을 갖춘 젊은 무용수가 태평소와 장구 반주에 맞춰 동래학춤을 춘다. 그 뒤로 텍스트가 흘러간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노장의 읊조림이다.


곧이어 젊은 여성 무용수가 등장한다. 뒷막에 비친 홀로그램 영상 속 자신과 함께 현재를 만끽하며 춤춘다. 무척 행복하게. 지금 한창인 무용수로서 다음 세대에게 멋진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3장 구성의 마지막은 중년의 이야기가 장식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가족 구성원이 된 무용수들의 이야기다. 영상 속 어린아이들이 벚꽃나무 아래 뛰노는 동안 누군가의 어머니는 빨래를 널고 화장을 하며,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 채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어찌 보면 식상할 수 있는 소재이지만 대중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무용수의 관점에서 풀어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다만 그 방법과 구성에선 새로움을 찾기 어려웠다. 노년이 다음 세대를 걱정하고, 청년이 자신의 푸른 봄날을 만끽하며, 중년이 자신의 가족을 아끼는 모습은 너무나 보편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스크린 속 텍스트와 3장에 등장하는 남녀 묘사는 동시대 안무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싱커페이션’ (c)국립극장


정소연 안무 ‘싱커페이션’

정소연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낸 작품 ‘싱커페이션’을 선보였다. 음악 용어를 제목으로 삼았듯이 실제 공연의 음악적인 면에 당김음을 적극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 역시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안무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죽음, 욕정, 인내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국악기 연주를 전반에 배치하고 재즈피아노를 사용해 보다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했다. 이날 함께 공연된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은 숫자의 무용수와 음악가가 출연한 것이 눈에 띄는데, 짜임새를 갖춘 한 편의 공연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듯했다.


작품의 앙상블이자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무용수 다섯 명의 춤은 나머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저 무겁기보다 유쾌하게 죽음을 다룬 것이 특징. 욕망을 표현한 장면에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인내를 다룬 장면에선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각각 중앙에 등장해 자신만의 춤을 펼쳤다.


한 편의 무용극을 완성하고자 하는 안무가의 의도는 곳곳에서 발현됐다. 그러나 달오름극장 무대는 7명의 무용수와 6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서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리면 적절할 만한 세트와 구성이었다. 작품을 풍부하게 채우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2인무나 독무에 집중하기엔 너무도 산만했다. 전반적으로 기획과 구성의 면에서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드라마투르기 혹은 기획자의 부재가 느껴졌다. 마지막을 장식한 김미애의 소고춤은 그 자체로 관객을 매혹하기에 충분했으나, 전체 구성에서 어떤 의미와 연관을 갖는지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가무악칠채’ (c)국립극장


이재화 안무 ‘가무악칠채’

메인 카피로 내건 ‘젊은 창작’의 빛이 사그라드는 것 같던 때, 마지막 순서로 오른 이재화 안무 ‘가무악칠채’가 객석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농악에서 자주 사용되는 칠채 장단을 주제로 창작한 작품이다. 안무가를 포함한 비슷한 연배의 무용수 다섯 명과 소리꾼 한 사람이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안무가가 칠채 장단을 가르쳐주는 데서 시작된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몇 개의 국악기로 장단을 연주해 그 소리를 켜켜이 쌓는다. 구음으로, 몸짓으로, 박자로, 음악으로, 춤으로… 서서히 변형해가며 칠채장단을 부풀린다. 그리고 소리꾼이 등장해 관객이 장단을 효율적으로, 보다 다채롭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여러 종류의 서양악기가 들어오면서 장단은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무용수들은 그 속에 숨어 있는 고유한 장단에 맞춰 자유롭게 춤춘다. 아주 신나고, 흥미롭게. 전통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지고 가볍게. 확실히 젊은 움직임이었다.


장단에서 시작해 완성된 음악은 이질적이면서도 형용하기 어려운 중독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관객에게 내재된 흥을 이끌어냈다. 이들의 춤은 어떠한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그저 자유롭다. 일종의 라이트 모티프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안무가 일관적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각각의 무용수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동작을 십분 살린 것이 눈에 띄었다. 남성 무용수 네 명에 박혜지를 캐스팅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오랜 전통을 오늘의 방식으로 무대 위에 올린 안무가의 선택에 감탄했다.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닌 세 작품을 한 무대에서 보는 일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작품마다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음악이 참 좋았다. ‘어;린 봄’에 MR로 참여한 4인놀이의 음악은 간결하면서도 그만의 ‘쪼’가 느껴졌고, ‘싱커페이션’은 재즈피아노가 다소 튀기는 했으나 작품의 무게를 확실하게 잡아준 연주가 훌륭했다. ‘가무악칠채’는 말해서 무엇하랴. 음악이 없으면 완성되지 못할 작품이었다. 복잡한 장단을 완벽에 가깝게 들려준 불세출과 객원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공연이 끝나고, 세 안무가가 보여준 춤의 결을 곱씹어봤다. 김병조의 안무는 전통을 놓지 않으려는 점이 엿보였고, 정소연의 안무는 전통의 색채가 깊이 물들어 있었으며, 이재화의 안무는 국립극장에서 전통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강박에서 자유로웠다. 다만 그 뿌리의 끝이 전통 언저리에 닿아 있을 뿐. 안무’가’가 좀 없으면 어떠할까, 동시대 한국 창작춤의 색깔이 이렇게나 다채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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