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 Emi : Mother>
<에미 Emi : Mother>
1996년 초연 이래 22년간 꾸준히 공연된 안무가 박명숙의 대표작 <에미 Emi : Mother>가 2018년의 관객과 마주했다. 자식을 챙기기라도 하듯 공연 내내 무대 한편에서 말을 건네는 늙은 어미와 각박한 삶을 살아가기에
바쁜 인물들. 춤은 그 현실을 보여주는 한편, 강인한 생명력으로 세상을 견뎌온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애도를 표한다.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에 힘겹게 오른 늙은 어미가 독백을 시작한다. 치마저고리는 아무렇게나 붙잡아 맸고, 머리칼은 반쯤 하얗게 센 모습이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쥐가 들었다는 둥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부터 지나간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누구나 경험 혹은 상상해봤을 어머니의 모습이다. 홀로 이야기를 건네는 늙은 어미의 뒤로 현대 복장을 한 무용수들이 등장하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안무가 박명숙의 대표작 <에미 Emi : Mother>는 1996년 초연 이래 22년간 꾸준히 공연된 레퍼토리다. 박명숙은 그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여성의 삶, 자연과 만물에 관심을 두고 이를 토대로 한 여러 작품을 발표해왔다. 이들 작품은 한국적 소재와 연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중성이 짙은 것이 특징이다. <에미 Emi : Mother> 역시 그러한 안무가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이번 재공연에서는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해 작품의 중심이 되는 어미가 치매 노인이라는 설정을 가미했다.
총 8개 장면은 여성으로서 주인공이 살아온 시간을 한 편의 영화 필름처럼 보여준다. 빠르게만 흘러가는 사회, 사람 사이의 정이 사라진 도시의 모습, 퇴폐적인 풍경과 애도의 감정이 마구 혼재된 채 펼쳐진다. 일상적인 풍경, 특히 집안일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포착한 움직임을 토대로 구상한 춤 동작은 현대무용이라면 일단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든 채 춤을 추거나 쓰레기통을 붙들고 거꾸로 서서 바둥거리는 모습 등 무대 전반에 배치된 오브제는 장면의 모티프가 된 어미의 삶을 반추하도록 도왔다. 여기에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과 같이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의 주선율을 편곡한 음악과 사운드가 더해져 친숙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자아냈다.
특히 한국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한국무용의 춤사위로 안무를 구성한 것이 많은 관객의 공감대를 자극했다. 작품 전반에서 어미는 과거의 사람으로, 자식 세대는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어미와 젊은 여인(어미의 젊은 시절 혹은 딸자식을 상징)이 함께 추는 5장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리움의 감정을 끌어냈다. 때마침 ‘문화가 있는 날’을 맞아 객석엔 중장년층 관객이 다수 자리했고, 이 장면의 몰입도가 남달랐다.
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어미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8장과 9장이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어미가 쓰러지자, 그 뒤에 선 무용수 세 명이 비탄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장엄한 피아노 독주에 맞춰 가슴을 내리치고, 바닥을 구르며 부모의 죽음 이후에야 부모의 마음을 깨닫고 한탄을 토해낸다. 이 장면은 군무로 확대되면서 정렬한 무용수들이 강렬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창작된 지 시간이 꽤 지난 탓에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식에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1996년과 2018년 사이 우리 사회가 이뤄낸 변화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먼 과거가 아닌 1990년대에 한국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곱씹어보게 됐다. <에미 Emi : Mother>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친근한 춤사위와 음악, 그리고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작품이다. 지나온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하는 우리 사회와 끊임없이 호흡하며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글 김태희 무용 칼럼니스트
*경기도문화의전당 격월간 「예술과 만남」 2018년 12월+201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