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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의 주파수 찾기

요한 잉에르 더블 빌

by 김태희

서울시발레단 <요한 잉거 워킹 매드&블리스>

2025년 5월 9~18일 | 세종M씨어터



레퍼토리가 곧 단체의 색깔을 결정한다. 창단 두 번째 해를 맞이한 서울시발레단이 발표한 시즌 라인업에서 행보를 유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지난 3월 오하드 나하린 <데카당스 Decadance>를 공연한 이들이 5월, 두 번째로 선택한 안무가는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의 요한 잉에르. 2017년 스페인 국립무용단 <카르멘 Carmen>(2015) 내한과 2012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개막 무대에 오른 쿨베리 발레 <검정과 꽃 Negro con Flores>(2005)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은 안무가다.


서울시발레단은 잉에르의 안무작 가운데 <워킹 매드 Walking Mad>(2001)와 <블리스 Bliss>(2016) 두 편을 더블 빌로 선보였다. 각각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와 이탈리아 아테르발레토에서 초연한 것이다. 유럽에서 발표한 지 최소 10년이 넘은 두 작품은 서울시발레단 무용수들에 의해 서울에 안착했다. 무대는 안정적이었고, 무용수들의 기량은 탁월했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었나? 이들에게서 더 기대되는 장면이 있었나?


라벨 ‘볼레로’와 패르트 ‘알리나를 위하여’를 병렬로 배치한 <워킹 매드>는 무대예술로서 클리셰를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토록 유명한 ‘볼레로’를 사용한 수많은 작품과 어떻게 차별점을 이룰 것인지, ‘경계’ ‘단절’ ‘한계’ 등 제한적인 메타포를 지닌 벽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또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피케 셔츠를 입은 남성이 합을 맞출 때 발생하는 제한된 서사성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발표되는 초연작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관객에게 이 작품이 매력을 발휘하려면 20년 넘는 세월을 뛰어넘는 지점이 발생해야 한다. 서울시발레단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에서 활약하는 이상은을 국내 무대에 소개하는 것으로 당위성을 제시했으나, 뛰어난 무용수와의 재회는 한국 발레의 발전을 상기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는 못했다.


이어진 <블리스>는 중극장 규모의 세종M씨어터 무대 전면을 개방해 관객의 시야를 완전히 텄다. 도시의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바깥을 바라보는 듯한 풍경은, 재즈 음악이 품은 분위기를 고조하기에 충분했다. 키스 재럿의 잘 만들어진 녹음 중에서 안무가가 택한 것은 1975년 ‘쾰른 콘서트’ 실황이다. 재연될 수 없는 즉흥 연주를 기록한 음반을 통해 박제된 즉흥성이 반세기를 지나 오늘의 무대에서 안무의 즉흥성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이는 안무가의 창작이 아닌, 오히려 무용수들에게 달린 문제다. 따스한 조명이 내리쬐고, 무용수들이 노닌다. 객석을 향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춤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춤의 기쁨에 동참할 준비가 되었는지 넌지시 묻는다. 시즌무용수의 이름으로 서울시발레단에 함께하고 있는 무용수들의 연대, 그리고 그 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창단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던, 프로젝트 단원에 대한 의심을 불식하는 순간이었다. 안무가의 이름은 지워지고, 무용수가 부상했으며, 춤과 리듬이 남았다.


고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클래식 발레는 재안무 혹은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수정의 과정을 거듭한다. 반면 컨템퍼러리 예술은 초연의 위엄을 이기지 못하면 그 가치가 빛을 발하기 어렵다. 시차가 명백한 요한 잉에르의 두 작품은 서울시발레단이 해야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들여다보게 했다. 한스 판 마넨부터 안성수를 지나 주재만까지, 모던 댄스와 컨템퍼러리 발레 사이 서울시발레단이 어느 지점에 주파수를 맞출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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