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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Jan 16. 2017

예술과 외설의 차이

앙줄랭 프렐조카주 ‘봄의 제전’

“정말 다 벗습니까?” “대체 벗는 이유가 뭔가요?”


2003년 10월, ‘봄의 제전’으로 내한한 앙줄랭 프렐조카주를 향한 한국 기자들의 관심은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아닌 그저 ‘누드’에 집중됐다. 주최 측 사무실에는 연일 “누드 공연을 하는 게 맞느냐”는 전화가 빗발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한국 무용계에는 다시금 ‘벗는 무용’이 화두로 떠올랐다. 프렐조카주는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공연에 대해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연을 보여줄 것’이라는 말로 그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했다.


1913년 초연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이제껏 들어볼 수 없었던 그로테스크한 음색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는 이교도의 의식을 소재로 하는 이 곡은 배경만큼이나 그 선율 또한 음울하고 강렬하다. 초연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무용이 공연됐다. 슬라브 민족의 의상을 입고 무대를 쾅쾅 내리 찧는 춤은 음악과 더불어 관객들에게 놀랄만한 시·청각적 자극으로 다가왔다.


초연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두가 되는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홀수로 떨어지는 박자와 강렬한 리듬, 곡 전체를 손 안에서 주무르듯 강약을 오가는 선율이 이어진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박자는 인간의 내재된 본능을 깨우고, 곡 전반에 가미된 민족적인 선율은 배경이 되는 이교도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가진 ‘실험성’을 무기로 기존 러시아 음악의 틀을 깨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Jean-Claude Carbonne


당대 최고의 안무가들이 도전한 ‘봄의 제전’

이색적인 주제와 양극단을 오가는 강렬한 사운드로 많은 음악가들을 매료시킨 ‘봄의 제전’은 현대의 안무가들에게도 매력적인 음악이다. 모리스 베자르, 피나 바우슈, 마사 그레이엄, 폴 테일러, 마츠 에크, 앙줄랭 프렐조카주, 사샤 발츠와 같은 당대 최고의 안무가들이 이 작품에 도전했고, 같은 맥락을 갖고 있지만 다양한 성격의 ‘봄의 제전’이 탄생했다.


모리스 베자르 버전(1959)의 ‘봄의 제전’에서 무용수들은 자연을 닮은 짙은 초록색과 황갈색의 유니타이즈를 입고 등장한다. ‘대지를 향한 경배’에서는 무작위로 땅을 구르며 뛰고 기계적인 동작을 행하며 베자르 스타일의 안무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전반부에는 남성 무용수, 후반부에는 여성 무용수 군무가 등장해 움직임의 대비를 나타내는 한편, 마지막에는 이들이 섞이고 한 커플의 무용수가 위로 들어 올려지며 마무리된다. 제의로 인해 희생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제의 가운데 탄생한 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며 현대무용의 새 장을 연 피나 바우슈(1975)의 ‘봄의 제전’ 역시 무용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2012년 개봉한 영화 ‘피나’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봄의 제전’은 섬세하면서도 거칠게 표현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펼쳐진다. 대지를 상징하는 흙이 바닥에 깔리고 그 위에서는 무용수들이 얽히고설키며 제물로 바쳐질 한 사람을 골라낸다. 자신의 신체를 때려 소리를 낸다든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랄만한 에너지로 팔짝 뛰는 동작들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대변한다. 봄의 신에 바쳐질 제물로 간택된 무용수에게는 붉은색의 드레스가 입혀지는데, 홀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은 두려움과 광기로 넘치다 못해 정적인 슬픔으로 귀결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Jean-Claude Carbonne


프렐조카주, 스트라빈스키를 요리하다

2000년대 들어 발표한 앙줄랭 프렐조카주 버전(2001)은 이전에 나온 작품들과는 색다른 ‘봄의 제전’이다. 이 작품을 다룬 대부분의 안무가들이 신체와 비슷한 색의 의상을 선택했던 것과는 달리 프렐조카주는 무용수들에게 다양한 색상의 평상복을 입혔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점차 탈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무용수들의 신체에 주목한 것이다. 제물로 지목된 여성 무용수는 마지막에 이르러 전라의 상태로 춤을 추게 된다. 그리고 이 ‘벗겨진 몸’은 제의로 하여금 희생된 여성을 대변한다.


음악을 활용하는 방법 역시 독특하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강렬한 선율에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구조화된 안무를 선보인다. 마치 스트라빈스키가 휘갈긴 음악을 프렐조카주가 재정리하는 듯하다. 곡 중간중간에 존재하는 쉼표의 미학은 긴장감 있게 살려냈다. 여섯 명의 여성 무용수와 또 다른 여섯 명의 남성 무용수는 각각 군무를 이루기도 하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하는데, 무용수가 아닌 평범한 사회 구성원들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무대의 중앙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언덕 모양의 구조물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이 구조물은 필요에 따라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제물을 던져 넣는 장치가 된다.


프렐조카주의 안무는 40여 분의 러닝타임을 그야말로 ‘콤팩트(compact)’하게 사용한다. 여성 무용수들이 등장해 속옷을 내리고 발목에 건채 춤을 추는 장면에서부터 남성 무용수들이 상의를 탈의하고, 결국은 제물인 무용수가 전라의 상태가 되기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여섯 커플의 무용수들은 격렬한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에 맞춰 빠르고 신속한 움직임으로, 부드럽지만 그 안에 힘이 존재하는 춤을 선보인다. 누워서 몸을 튕긴다거나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장면들은 신체의 역동성과 탄력성이 넘친다. 화제의 마지막 장면은 ‘봄의 제전’의 창작 의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다수의 남녀에게 옷이 벗겨진 무용수는 홀로 춤을 추고, 나머지 무용수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둥그렇게 돌며 제의를 치른다. 제물이 된 여성 무용수가 추는 춤은 어떠한 절규나 오열 없이도 그 두려움을 온전히 드러내고, 강렬한 마지막 음과 함께 쓰러진 무용수를 오래도록 비추는 마지막 순간은 긴 여운을 남긴다.


앙줄랭 프렐조카주는 첫 내한이었던 1996년 발레 뤼스에 대한 오마주인 ‘퍼레이드’ ‘장미의 정령’ ‘결혼’을 공연한데 이어 2003년 ‘헬리콥터’와 ‘봄의 제전’으로 무용 관객들 사이에 자신의 입지를 넓혔다. 특히 ‘봄의 제전’은 누드에 집착하던 관객들에게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최근에 내한한 2012년 국제현대무용제(MoDaFe)에서는 혼돈스러운 세상 속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을 다룬 ‘그리고, 천 년의 평화’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2014년, 이번에는 그의 예술관을 응집한 ‘백설공주’로 관객들을 만난다. 그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 현대카드 슈퍼시리즈 블로그 내 컬처프로젝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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