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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Jul 09. 2016

사랑의 감정과 에로티시즘

앙줄랭 프렐조카주 ‘공원(Le parc)’

ⓒLaurent Philippe/Opéra National de Paris


앙줄랭 프렐조카주. 정치, 사회, 성(性), 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 거침없이 다뤄온 그의 작품세계는 다소 거칠 정도로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 왔다. ‘봄의 제전’과 ‘결혼’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거칠게 표현하는 한편, ‘메데아의 노래’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사회적 소수로서의 여성을 묘사했다. 마태복음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온 ‘MC/14-22’에서는 한 사람이 타인에게 행할 수 있는 것들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최근에 발표한 ‘그리고, 천 년의 평화’는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해 혼돈스러운 현 사회에서 국가와 민족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며 사회에 일침을 가했다.


이렇듯 다양한 주제를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텍스트를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그의 탁월한 해석에서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동화지만 내용을 살짝 비틀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 ‘백설공주’가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추상적인 스타일의 안무, 뛰어난 내면 묘사, 세밀한 스토리 전개가 더해지면 프렐조카주 특유의 작품이 완성된다.


ⓒLaurent Philippe/Opéra National de Paris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몇 개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에로티시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작업한 ‘공원(Le Parc)’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이라는 영예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1994년 안무한 이 작품은 공원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남녀를 모티프로, 라파예트의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과 쇼들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텍스트를 활용해 처음 만난 남녀의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담담하지만 감성적으로 흐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곡과 어우러지는 프렐조카주 스타일의 안무는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채색하듯 점차 ‘사랑’의 감정을 물들여 간다. 18세기 프랑스를 상징하는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의상이 시대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프랑스식 공원의 풍경은 모던한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3장으로 구성된 작품 속에서 남녀의 감정은 점차 격정적으로 변화하고 에로티시즘의 절정을 장식하게 된다.


ⓒLaurent Philippe/Opéra National de Paris


사랑의 감정으로 작품을 물들이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네 명의 정원사는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각 장의 이야기를 이어주고, 현대와 고전의 경계를 오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1장은 공원을 거닐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남녀가 서로 대치한 채 춤을 추는 장면은 마치 소개팅의 한 장면을 감상하는 듯 어색함만이 흐를 뿐이다. 각자의 춤에 충실하던 남녀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무심한 듯 외면하지만 눈빛은 이미 이성을 향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다. 이어지는 모차르트의 독일춤곡에 맞춰 서로의 매력을 발산하는 군무는 춤곡 리듬을 활용한 재치 있는 안무가 돋보인다. 조용히 눈길만 주고받던 주인공 남녀의 파드되(2인무)에서 두 사람은 소매 자락조차 스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춤을 추기만 한다. 아직은 어색한 그들 사이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4번만이 덤덤히 흐르고, 무대 뒤에는 빨갛게 노을이 내려앉으면서 그렇게 첫 ‘만남’ 파드되는 끝이 난다.


ⓒA. Poupeney/Opéra National de Paris


2장이 시작되면 풍성한 드레스로 한껏 화려하게 꾸민 여인들이 등장한다. 자지러질 듯한 웃음소리와 들뜬 표정은 막 연애를 시작한 소녀의 모습 같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몇 개의 기둥이 세워진 무대에는 남녀의 술래잡기가 펼쳐지고, 1장과는 달리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입은 여인들이 한껏 끼를 부리며 공원에서의 유쾌한 연애가 한창이다. 프렐조카주 특유의 발레 동작을 변형해 자유분방하면서도 형식적인 움직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바탕 군무가 끝나면 정원사들에 의해 이끌려온 여인이 다시금 남자와 마주한다. 2장의 파드되는 ‘저항’이라는 이름처럼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시종일관 무심하기만 하다. 마음은 그에게 끌리지만, 무엇 때문인지 애써 거부하려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프렐조카주는 피아노 협주곡 15번 안단테를 사용했는데 남자는 피아노의 선율에, 여자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따라 춤추도록 배치했다. 협주곡을 자유자재로 이끌어가는 피아노 연주처럼 남자 역시 춤의 ‘밀당’을 주도하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여인은 상처만 남기고 떠나버린다.


어둠 속 별빛만 반짝이는 3장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손꼽힌다. 남자를 다시 찾아온 여인은 그의 앞에서 여성의 자존심과 같은 드레스를 벗어 내리고 진정한 사랑을 맞이한다.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온 몸으로 정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 파드되에 프렐조카주는 ‘단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모든 상황을 잊은 채 오로지 사랑의 감정에 충실하는 남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무용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피아노 협주곡 23번 아다지오와 함께 흐르는 이 파드되는 정적이기에 남녀의 감정을 더욱 격정적이고 에로틱하게 드러내는데, 이 장면은 사실상 섹스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달려 공중에서 키스하며 끊임없이 회전하는 장면은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프랑스 국영항공사 에어프랑스의 광고에 사용되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이 장면은 프렐조카주의 ‘공원’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곤 한다.




프렐조카주식의 ‘사랑’을 만나다


소설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앙줄랭 프렐조카주만의 색채를 더한 ‘공원’은 섬세한 인물의 내면 묘사와 충만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으로 하여금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그려낸 ‘사랑’은 우연한 만남으로 한눈에 반해버리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겉모습에 치중해 감정에 앞서 이성적으로 가늠하고 따져본 후에야 사람을 만나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한 편의 작품에 춤 이상의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프렐조카주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Elena Bauer/Opéra National de Paris


올 11월 내한하는 그의 대표작 ‘백설공주’ 역시 기존의 동화를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왕자의 키스만을 기다리는 공주의 모습이 아니라,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간다는 점을 부각했다. ‘공원’에서 만날 수 있었던 프렐조카주 특유의 에로티시즘을 이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권력을 쥔 계모와 대비되는 무기력한 왕의 캐릭터 역시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 현대카드 슈퍼시리즈 블로그 내 컬처프로젝트에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http://superseries.kr/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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