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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Aug 02. 2016

판소리로 어루만지는 아픔의 기억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 창작판소리 ‘유월소리’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을 통해 탄생한 창작판소리 ‘유월소리’가 드디어 관객과 만났다. 기억제공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창작된 안숙선 명창의 소리를 통해 과거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는 한편, 이를 치유하고 희망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기록했다.


연신 눈물을 닦던 관객이 박수를 치더니 이내 “얼쑤”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본디 판소리에는 서민의 애환이 담겨있다고 했던가. 울고, 웃고, 기뻐하는 모습에 참사의 아픔과 이를 버텨왔을 시간이 눈에 선했다. 또 다른 관객은 공연이 끝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공연자에게 큰절을 올렸다. 잊혀가는 것을 되새기게 한 ‘소리’와 숙원을 해소할 수 있었던 ‘자리’가 그렇게 어우러졌다.


2013년부터 꾸준히 서울의 기억을 듣고 기록해온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가 시민들 앞으로 나섰다. 배우 문성근의 음성으로 탄생한 팟캐스트 ‘동대문’ 오픈에 이어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을 주제로 한 기획행사가 잇달아 진행된 것. 지난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를 기해 마련된 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예요’가 그 시작을 알렸고, 7월 3일에는 창작판소리 ‘유월소리’가 시민청 활짝라운지에 울려 퍼졌다. 이 지면을 통해 하루하루가 ‘화제’의 연속이었던 ‘유월소리’의 제작부터 공연까지, 그 현장을 소개한다.


시민청 활짝라운지에서 관객과 만난 창작판소리 ‘유월소리’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


구조대원의 증언이 판소리가 되기까지

시작은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을 주제 아래 언론보도, 연구논문, 판례 등 기초자료에 대한 연구를 마친 기억수집가들이 본격적으로 유가족, 생존자, 구조대원, 자원봉사자 등 삼풍 참사의 기억을 가진 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토대가 마련됐다.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삼풍’에 관한 자신의 기억을 제공했고, 이는 차곡차곡 서울의 기억으로 기록됐다. 그러던 중 ‘메모리인(人)서울프로젝트’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극작가 오세혁이 수집된 기억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고, 몇 번의 대화를 통해 판소리로 방향이 정해졌다. ‘우리의 이야기’이니 ‘우리 것’으로 풀어보자는 것이었다.


기억제공자들의 인터뷰와 음성녹음을 모두 넘겨받은 오세혁 작가는 이 가운데 민간구조대원 최영섭 씨의 에피소드를 발췌해 대본 작업에 착수했다. 애가 끓고 가슴이 저린 이야기도 많았지만 최영섭 구조대원의 이야기에는 참사의 아픔뿐 아니라 이를 이겨내려는 희망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을 다하는 모습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대본은 안숙선 명창에 건네 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가 다시 한 번 비극을 기억하고, 소리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기꺼이 나섰다. 가장 한국적인 소리를 통해 20년 전 참사가 다시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명창, 삼풍 참사를 보듬다

본 공연에 앞서 지난 6월 25일, ‘유월소리’의 언론시연이 진행됐다. 장소는 프레스센터도, 공연장도 아닌 안숙선 명창의 저택. 널찍한 마루가 깔린 자그마한 원형 공간에 그 모습을 담고자 찾아온 방송카메라가 빽빽이 자리했다. 짧은 시연이지만 안숙선 명창은 단숨에 극에 몰입해 절절한 감정을 쏟아냈다. 이날 현장에는 기자들뿐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인 최영섭 구조대원이 동석했다. 판소리로 재탄생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던 그는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시연 후 두 손을 맞잡은 명창과 구조대원은 이 같은 참사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았다.


드디어 7월 3일, 시민청 활짝라운지에서 ‘유월소리’의 막이 올랐다. 흰 치마저고리에 자색빛 고름으로 고고함을 덧댄 안숙선 명창이 무대에 오르자 왁자지껄하던 시민청의 공기가 단숨에 바뀌었고, 무대를 중심으로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명창은 “오늘 부르는 ‘유월소리’는 사실 부르지 말아야 할 소리”라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소리가 시작되자 이내 관객 대부분이 창과 아니리에 온전히 집중했고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였다. 백화점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대목에선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장단이 바뀌며 현장에서 결성된 민간구조대가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간다, 들어간다” 할 때는 관객들의 눈빛도 함께 반짝였다. 그러더니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외칠 적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공연 도중 안숙선 명창은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20년 전 참사를 현재로 불러오는 것은 지금껏 다양한 판소리를 노래해온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 가장 앞줄에 앉아있던 구조대원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명창에게 큰절로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간 풀지 못했던 미안함과 오래도록 안고 살아온 아픔을 해원하는, 자리에 함께 한 기억제공자와 유가족 모두를 대신하는 인사였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해마다 유월이 돌아오면 들려오는 여러 즐거운 소리들이 있지마는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땅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탕탕탕탕 소리들을 기억해주기 바라옵고 (중략)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를 진정으로 바라옵나이다.


아픔을 그저 묻어버리기보다 안타까운 일과 사라진 이들을 부단히 기억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판소리를 통해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명창의 인사 끝에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희망이 맞닿아 있었다.


글 김태희 서울문화재단 홍보팀 | 사진 서울문화재단


* [문화+서울] 2015년 8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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