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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Oct 29. 2016

보관된 기록, 새로운 창작의 기반이 되다

국립현대무용단 <아카이브 플랫폼>

때론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하곤 한다. 2015년 7월 17일부터 19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국립현대무용단의 <아카이브 플랫폼>을 관람하고 든 생각이다. 안애순 예술감독은 올해 초 ‘밑 끝 바깥’이라는 국립현대무용단의 2015년 시즌 주제를 발표하며 몸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원화함으로써 다양한 층위의 작품을 시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예술이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물론 이를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과 방법을 다각도로 넓히겠다는 의미다. 그에 따라 예술감독 신작과 레퍼토리 공연을 비롯해 국내외 안무가 초청공연, 젊은 안무가 창작 리서치 ‘안무랩’, 창작 공모전 ‘아카이브 플랫폼’ 등 다양한 형태의 공연으로 시즌을 구상해 발표했다.


그중 창작 공모전 ‘아카이브 플랫폼’은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 시즌 주제였던 ‘역사와 기억’의 연장선상에서 무용의 역사를 되새기고 현재를 거쳐 발전시켜 나가자는 프로젝트이다.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의 개념을 넘어서 이를 활용해 새로운 창작의 ‘플랫폼’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과거의 것을 ‘보관(archive)’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최신의 트렌드에 적절한 기획이다. 또한 이를 주제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모를 진행하면서,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었다. 실제로 나이, 학력, 경력은 물론 현대무용부터 발레, 한국무용, 스트리트 댄스까지 그 어느 것에도 제한을 두지 않고 아카이브를 활용한다는 것 하나만 전제로 달았다.


4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 공모전은 지난 3월 접수를 시작으로 서류심사와 면접심사, 그리고 쇼케이스 심사를 비롯한 여러 단계의 검증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둔 요소는 ‘아카이브의 활용’과 제출한 구상의 ‘실연 가능성’이었다고 한다. 세 단계를 거처 최종 선정된 작품들은 이후 본 공연 전까지 몇 번의 쇼케이스를 거치며 작품을 꾸준히 다듬었다. 이 점에서 창작 공모전 ‘아카이브 플랫폼’은 공모-선정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지원사업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지원을 기반으로 새로운 작품을 관객에 선보이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멘토링이나 전문가 피드백과 같은 인큐베이팅을 위한 요소가 반영되어 있었다. 최종 선정 이후 진행된 두 번의 내부 쇼케이스는 자칫 평론가나 심사위원의 피드백이 공모에 선정된 안무가들의 신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시도를 뭉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관객에 선보일 작품의 2% 부족한 부분을 미리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새로운 안무가들의 개성을 살리는 동시에 완성도를 갖춘 작품을 완성하면서 결과적으로 ‘아카이브 플랫폼’은 의미가 있는 초연을 이뤄냈다.


<아카이브 플랫폼>에 공연된 세 편의 작품은 그 면면이 아주 흥미롭다. 작품의 형태와 춤 스타일이 각기 다르고,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심지어 무용 전공이 아닌 지원자의 작품이 공모에 선정되면서 공연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아카이브의 범위가 대폭 확장됐다. 그 가운데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매체이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창작을 잇는 매개체로 모두가 ‘몸’을 활용한 것은 국립현대무용단이 의도한 핵심이 제대로 발현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공모의 주제인 ‘아카이브’는 어떠한가. 현대사회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의 것을 기록, 정리하고 활용하는 아카이브의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다. 무용도 마찬가지이다. ‘동시대성’을 중심으로 하는 컨템퍼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가 나타나면서 아카이브, 즉 과거의 것을 활용해 동시대에 맞게 재탄생시키는 작업방식이 활발해지고 있다. 2012년 선보인 필리프 드쿠플레(Philippe Decouflé)의 안무작 <파노라마(Panorama)>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그가 30년간 선보인 자신의 작품을 망라해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다. 1983년 작 <텅 빈 카페(Vague Café)>부터 2003년 작 태양의 서커스 <아이리스(Iris)>를 편집, 인용, 재구성함으로써 시대를 거치며 변화하고 있는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아카이빙함은 물론, 새로운 스타일로 재탄생시켰다. 그는 2014년 월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파노라마>를 제작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저는 ‘파노라마’를 통해 새로운 무용수들과 제가 좋아하는 발상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첫 작품이 가진 특유의 에너지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발전시켜왔던 아이디어를 모아서 재창조를 시도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옛 향수만 불러일으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아카이브는 과거의 유산을 넘어서 새로운 작업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대가’라 불리는 이들의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새로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예술과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적 진리가 때론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카이브’는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컨템퍼러리 예술에서 당연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보관된 기록(archive,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총 세 작품으로 구성된 <아카이브 플랫폼>의 막을 연 서영란 안무 <버자이나의 죽음(Death of the Vagina)>은 활자, 즉 ‘텍스트’라는 아카이브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의 대작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 4부작 중 1편 「원시 신화(Primitive Mythology)」를 다뤘다. 시대와 지역을 망라하는 전 지구적 신화 이야기를 연구해 온 캠벨의 저서 가운데 「원시 신화」는 신화적 양식 아래 깔려있는 주요한 주제와 고고학적 의미, 신화적 상상력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처녀잉태신화를 비롯해 신화에 나타나는 뱀의 상징, 샤머니즘의 주술, 피의 의례, 페르세포네 등 방대하고 기이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많은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우리네 이야기가 이러한 신화에서 기반하거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조지프 캠벨의 해당 저서는 예술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안무가 서영란은 이 텍스트에서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이미지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여신’성에 주목했고, 여기에 여성의 성기(Vagina)를 연결해 작품의 시놉시스를 구성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에게 한 권의 책이 주어진다. 이는 「원시 신화」를 부분 발췌해 제본한 것으로 관객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매개해 주는 통로가 된다. 스크린에는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키워드와 해당 본문을 찾을 수 있는 쪽 번호가 제시된다. 관객이 이를 인지하고 책을 펼치게 되면, 텍스트를 읽으며 공연을 보는 이중적 경험이 펼쳐진다. 네 명의 무용수는 차례로 나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혹은 텍스트를 낭독하며 움직임을 선보인다.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무대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말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추상적인 동작을 반복하기도 한다. 밧줄이나 이불, 의자와 같은 몇 개의 소품이 사용되지만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전반적인 장면 자체가 매우 일상적이고 자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움직임이 양립하는 무대 위 상황 자체가 이 작품이 의도한 아카이브의 무대화인 셈인데, 이 가운데 읽혀야 할 텍스트가 관객에게 보이는 움직임으로 치환되어 다가오게 된다.


한 편의 책에서 작품의 주제를 발견하고, ‘활자’로 기록된 아카이브를 무용에 끌어들였다는 점은 꽤 신선하나 그것이 실제 공연으로 시연되면서 몇 가지 불편한 점이 발견됐다. 일단 관객은 주제가 되는 책을 읽기 위해―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무대에 등장한 무용수가 해당하는 쪽 번호를 불러준다―계속해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스크린은 무대 뒤에 띄워져 있고 무용수는 앞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시선은 책을 읽기 위해 아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페이지를 뒤적이고 해당 문장을 찾기 위해 눈이 바삐 돌아간다. 책 읽기를 포기하고 무대만 보고 있자니 작품을 100% 완전히 즐기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아마 객석에 자리한 대부분의 관객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사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네 명의 무용수가 선보이는 움직임은 독자적인 춤이 되지 못하고 마임 혹은 설명에 그치는 애매모호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작품에서 다루고자 했던 주제인 ‘여성 성기의 죽음’에까지 미처 이르지 못하고 텍스트를 나열한 채 작품이 마무리됐다. <버자이나의 죽음>이라는 작품명을 보며 같은 소재를 다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1996)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성의 성(性)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연극과 달리 이 무용작품은 다루고자 했던 본질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원시 신화」를 기반으로 신화학과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하고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한 점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텍스트와 움직임의 유기성이 더욱 긴밀해진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쌍방 안무·출연의 <삼인무 교육부(TED: Trio Education Department)>는 ‘아카이브 플랫폼’을 통해 선보인 세 편의 작품 중 아카이브를 활용해 가장 무용에 적합한 형태로 재창안한 작품이다. <삼인무 교육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현대무용사에 등장하는 삼인무(3인무)를 아카이브 삼아 이를 토대로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에 편재하고 있는 ‘3의 존재’를 발견해 나간다. 동양철학에서 3이라는 숫자는 완전수(數)로 일컬어지는데, 1은 홀수이자 양(陽)이고 2는 짝수이자 음(陰)이기에 1과 2를 합한 3이야말로 음양의 조화를 이룬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수를 이용한 이들의 무대는 삼인무의 구성부터 동작, 작품에 이르기까지 ‘3’이라는 요소를 다채롭게 활용해 신선하고 재치 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앞서 공연된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무대에도 스크린이 사용됐다. <버자이나의 죽음>이 ‘텍스트’를 활용했다면 <삼인무 교육부>는 ‘영상’을 활용한 것이 차이점으로 보인다. 청자켓과 흰 바지로 의상을 맞춰 입고 나선 이들은 각 잡힌 삼인무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주목을 일순간에 사로잡았다. 이어 김승록이 마이크 앞에 서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일인무(독무)나 이인무(듀엣)에 비해 삼인무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지, 삼인무는 독무와 군무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지, 실제로 삼인무는 독무와 듀엣에 비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지 등 대답 없는 그의 자문(自問)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삼인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어서 피나 바우슈(Pina Bausch) 안무 <카페 뮐러(Café Müller)>의 한 장면을 재현해 선보인다. 남자에게 안기는 여자, 안아주는 남자, 그리고 여기에는 대다수의 관객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여자가 남자에게 안기게 해 주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이처럼 <삼인무 교육부>는 우리가 놓쳤던 명작 속 삼인무 장면을 상기시키는데, 이 지점에서 관객은 쌍방이 작품에 내포한 의도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시대 순에 따라 숫자 ‘3’에 관한 중요한 사건을 나열하고 재현하는 장면에서는 삼인무에 대한 이들의 연구와 아카이브의 활용이 빛났다. 무대 뒤 스크린을 통해 공연예술사와 과학사의 중요한 순간들이 연도와 병기돼 띄워지고, 무용수들은 그것을 관객이 단숨에 알아챌 수 있도록 명확하고도 절묘한 한 장면으로 묘사한다.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의 <삼화음 발레(Triadisches ballett)>,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A(Trio A)> 등 무용만이 아니라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세 자매(Three Sisters)>,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 보편적 사례를 포함해 무용을 잘 모르는 관객들도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카이브의 활용 면에 있어서 특히 훌륭한 점으로 짚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띠를 두른 모습으로 삼인무의 동작을 구성하는 방법을 시연하는 것은 삼인무 ‘교육부’라는 작품명과 썩 잘 어울리는 아카데믹한 장면이다. 무대에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에 맞춰 동작을 연습하는 과정을 엿보게 하는 것은 늘 완성된 안무만을 봐왔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한편, “다시” “실패”와 같은 제동장치를 넣어 세 명으로 구성된 동작을 만드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삼인무 교육부>는 대중가요를 다루기까지 하는데 앞선 장면들이 독무나 듀엣의 속성을 가진 삼인무를 보여주었다면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와 걸그룹 오렌지캬라멜의 ‘나처럼 해봐요’를 유쾌하게 소화하는 장면은 세 명의 구성만으로도 군무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에 관객의 시야가 닿지 않는 부분은 영상으로 보여줘 다각적인 이해를 도왔다. 이 와중에도 “공간이 바뀌면 무용지물이 됩니다”라며 대칭성을 가진 독무나 듀엣과 달리 삼인무가 갖는 어려움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작품은 아카이브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활용으로 자칫 모범생처럼 바람직하기만 한 지루함으로 빠질 뻔했으나, 작품 군데군데 삽입된 유머와 재치가 이를 살렸다. 쌍방의 공동대표 이세승은 춤웹진을 통해 “삼인무가 독무(Solo)나 이인무(Duet), 군무에 비해 주목받지 못해왔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렇다면 삼인무를 그저 이인무를 통해서 도달하는 결과이자 군무로 발전하기 전의 원인으로만 여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을 두루뭉술한 느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자세히 알고 개념을 명확히 하여 소유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라고 작업의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 고민은 이들의 작품 <삼인무 교육부>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삼인무가 솔로나 듀엣보다 나은 점이 뭔가요?” “성비는 어떻게 되죠?” “삼인무로 된 유명한 작품을 아십니까?” “반복·변주로 군무보다 나을 게 없다는데요?” 등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던지는 질문들이 이를 방증하기 때문이다. 쌍방의 이번 공동작업은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은 물론 무용사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세 작품 중 마지막 차례에 공연된 송주호 안무의 <유익한 수난(Useful Sufferings)>은 그 탄생 배경부터가 독특하다. 스스로를 ‘몸치’라 칭하는 안무가 송주호, 유일하게 ‘무용’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춤을 선보이는 무용수 이경구, 마이크를 들고 누군가를 인터뷰하기 바쁜 큐레이터 김정현, 초반에는 기타를 치더니 중반부엔 과학을 설명하고 후반부엔 또 다른 캐릭터로 등장하는 출연자 원종우의 조합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작품을 살펴보기 전에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특이한 출연진의 면면을 살펴보자. 공모에 신청, 안무와 전반적인 연출을 맡은 송주호는 영화 연출을 시작으로 전시, 퍼포먼스 등으로 활동분야를 넓히고 있는 인물로, 2014년과 2015년 서울무용센터(舊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기획 작품을 연출한 경험이 있다. 그는 작품 초반에 등장해 자신의 경험을 관객들에게 털어놓는다. 어릴 적 예술고등학교 무용과에 진학할 뻔했던 이야기부터 자신이 왜 몸치인지, 춤을 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의 인생사와 관심사가 아카이브로 펼쳐진다. 유일하게 무용수로 출연한 이경구는 고블린 파티의 단원이자 한국현대무용협회 주최 제21회 신인데뷔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기대주로, 이 작품에서 자신의 작품 <우주정거장>을 아카이브해 선보였다. 드라마투르그를 맡은 큐레이터 김정현은 출연진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통해 과거의 기록을 추출하는 동시에 공연이 진행되는 무대를 아카이빙한다. 과학전문가 원종우가 무대에 선보이는 아카이브는 매우 당연하게도 ‘과학’이다. 양자역학을 주제로 무대 위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긴 머리 휘날리며 한때 인디밴드의 일원이었던 과학전문가가 기타 연주를 들려주는 사이, 춤을 추지 못하는 안무가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춤의 리듬을 끌어내 보이기 위해 바나나 껍질 위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하게 ‘춤’이라 우기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행한다. 무용수는 앞이 보이지 않는 네모난 틀에 갇혀 관객들이 볼 수 없는 움직임을 이어간다. 게다가 인터뷰이가 되어 짓궂은 큐레이터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우주과학이다. 과학전문가의 설명이 그렇고, 안무가가 무대에 보여주는 영상이 그렇고, 무용수가 추는 작품이 그렇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극적 상황은 중력이나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과학지식으로 풀어낸다. 안무가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원본과 자료를 재해석하고 ‘컨템퍼러리’ 하게 활용하는 아카이브 방식은 취하지 않았다. 그보다 ‘아카이브’라는 개념과 행위 자체를 우주과학적 원리와 사고방식으로 풀어내어 슬랩스틱화 한다는 주객이 전도된 메타 아카이브를 구현하고자 한다”라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그 결과 이 작품에서는 앞서 다룬 두 작품처럼―아카이브를 작품의 방법론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의 결과물을 선보였다―어떤 기록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창작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주어진 것을 ‘메타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영역까지 확장시켜 사고했다는 점에서 그 기발함을 인정할 만하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유기적인 면에서 전반적인 수정이 가해져야만 비로소 그들이 무대에서 겪은 수난이 유익한 결과로 남게 될 것이다.


올해 ‘아카이브 플랫폼’을 구성한 세 작품 <버자이나의 죽음>, <삼인무 교육부>, <유익한 수난>은 공통 주제인 ‘아카이브’를 서로 다른 형태와 방법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덕분에 관객은 한 자리에서 아카이브가 창작의 플랫폼이 되어 세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다채로운 시도를 살펴볼 수 있었다. 텍스트를 아카이브로 활용한 서영란 안무 <버자이나의 죽음>은 활자로 기록된 지식을 움직임으로 풀어냈다. 시놉시스나 플롯을 구성하는 데 있어 텍스트는 공연과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인데, 이 작품은 텍스트를 고스란히 무용공연에 가져오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치 연극의 대본과 영화의 자막과 같은 방법으로 무용에 텍스트를 덧씌운 셈이다. 쌍방이 공동안무한 <삼인무 교육부>는 무용사에 기록된 작품들을 아카이브로 가져왔다. 무용을 토대로 또 다른 무용을 재창안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쌍방은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관객의 기억 언저리에 있는 여러 작품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했으며, 과거의 것을 동시대적 방법론으로 풀어내 새로운 시각을 더했다. 공모 선정 당시 의견이 분분했던 송주호 안무 <유익한 수난>은 이성(理性)의 영역인 과학지식을 감성(感性)의 영역이라 불리는 예술의 한 부분으로 끌어왔다. 무용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완성작이라기에 다소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아카이브인 ‘진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도록 시도한 것이 독특한 감상으로 남았다.


이 외에도 <아카이브 플랫폼>은 ‘보관된 기록(아카이브)의 활용’이라는 또 하나의 창작법을 제시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로써 타 장르와 컬래버레이션(협업)을 진행하거나 정해진 공간(극장)을 탈피해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 융·복합 공연을 펼치는 등 근래 나타나고 있는 다이내믹한 무용창작의 동향에 ‘아카이브의 활용’이 추가될 수 있을 듯하다. 작금의 상황을 창작의 ‘방법론(論)’이라고 거창하게 지칭할 수는 없으나 무용계 흐름에 있어 중요한 용법의 하나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세 편의 작품을 보면서 공연예술에 대세로 등장해버린 텍스트와 영상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텍스트는 무용수의 움직임이나 발성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영상은 움직임으로 드러낼 수 없는 범위의 것을 대신해 보여주는 상호보완적인 도구가 된다. 이같이 ‘아카이브’와 ‘리서치’ 그리고 멀티미디어의 활용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개념무용(Conceptual Dance)의 흐름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짐작해본다.


국립현대무용단 창작 공모전 ‘아카이브 플랫폼’은 거창한 제목을 온전히 충족시키기에는 어렵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아카이브(archive)’라는 현대사회에 중요하게 등장했지만 다소 광범위하고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신진 예술가와 협업해 창의적인 프로젝트로 지원했다는 점이 그렇다. 특히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신진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시도를 국립단체가 든든하게 뒷받침한다는 것만으로도 응원의 박수를 보낼 만하다. 더불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품에 멘토링과 피드백을 제공한 것은 국립현대무용단이 국립기관으로서 수행해야 할 과업 중 하나인 ‘신진 안무가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라 사료된다. 창단 5주년을 맞이하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고 있는 국립현대무용단이 앞으로도 이와 같은 신선한 기획을 자주 선보이길 기대해 본다. 


글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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