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翟
땅은 두터워 만물을 실으니 / 한없이 넓고 크도다 / 우리 모든 백성을 존립하게 하시니 / 만세토록 힘입으리라 / 제단은 엄정하고 / 제물의 향기 그윽하도다 / 공손히 폐백을 받드니 / 제사가 잘 갖추어졌도다
- 악학궤범 중 제례 악장 ‘전폐’
종묘제례악 중 하늘의 혼과 땅의 넋을 부르기 위해 폐백을 올리는 절차인 ‘전폐’. 전폐희문이 연주되고 일무 중 문무가 거행된다. 왼손은 약을 쥐고, 오른손에는 적(翟)을 든다. 약과 짝을 이룬 ‘적’은 1자 4치 5푼(약 46센티미터) 길이의 나무 자루에 용의 머리를 조각해 달고, 그 아래로는 꿩의 깃털로 만든 세 개의 유소를 엮어 홍록초로 장식했다. ‘적’은 눈에 보이는 것, 즉 ‘용(容)’을 위한 것으로 예를 갖추는 간결한 춤 속에 유일하게 맵시를 내는 의물이다.
국립무용단 ‘향연’의 문을 여는 ‘제의’. 줄지어 곧게 선 무용수들이 일무를 구현한다. 화려한 색감의 궁중의상과 의물에서 색과 세부를 지우니 핵심이 되는 골자만 남았다. ‘전폐’의 현장은 무대로 옮겨지며 오방색 대신 흑과 백으로 채워졌다. ‘약’은 내려놓고, ‘적’을 양손에 들었다. ‘제의’의 토대가 되는 일무는 간결한 동작과 획일적인 움직임이 돋보이는 춤이다. 두 손에 든 ‘적’은 공경과 사양·겸양을 표현하는 무용수의 정형화된 움직임과 대비된다. 바람에 흔들리며 위에서 아래로 울림이 생기고, 서로 스치며 소리를 만들어낸다. ‘향연’을 시작하기 위한 순백의 제의를 가장 아름답게 완성한다.
글 김태희 | 사진 전강인
※국립극장 「미르」 2017년 2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