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분장도 소품도 없이, 고수와 단둘이 무대에 오르는 소리꾼에게 부채는 긴 여정을 함께하는 유일한 친구이자 지휘봉이 된다. ‘흥부가’에선 쓱싹쓱싹 박을 가르는 톱이 되고, ‘적벽가’에선 활시위를 당기는 조조의 화살이 되고, ‘심청가’로 넘어가면 눈먼 심봉사의 지팡이로 분하니 이만한 재주꾼이 어디 있을까. 우렁찬 소리와 함께 부채를 활짝 펼치면 세상이 열리고 막이 오르며, 다시 한 몸으로 접힐 땐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한숨 쉬어가는 여백을 만든다. 소리꾼이 부채를 놀리며 너름새를 취하면 넓게 뻗은 부챗살에서 일어난 바람이 관객에게 가 닿는다.
부채의 활약상은 소리판뿐 아니라 춤판에서도 눈부시다. 우리 춤에서 부채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무용수의 예술성을 완성하는 중요한 부분. 붉은색과 화려한 그림을 담아 무당의 도구가 되고, 순백 바탕에 사군자를 그려 넣어 선비의 섬섬옥수를 장식하며, 꽃과 깃털을 달아 호화로운 부채춤의 중심을 이룬다. 무용수의 손끝에서 맵시를 뽐내는 부채의 빛깔 따라 춤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부채는 우리 조상들의 멋과 풍류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는 계급과 지위를 점잖게 드러내는 필수품이었고, 기생과 무녀에겐 화려함을 더하고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무구였다. 예인의 삶과는 더욱 가까이서 함께해왔다. 소리꾼에겐 실과 바늘 같은 벗으로, 무용수에겐 화려하고 아름다운 태를 빛나게 하는 정인(情人)으로.
글 김태희 | 작품사진 전주부채문화관
※국립극장 「미르」 2017년 3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