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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Feb 13. 2017

아름다움에 가려진 몇 가지 이야기

국립무용단 '향연'

국립무용단 '향연'이 막을 내렸다. 2015년 12월 초연한 이래 매년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전통무용이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고, '3년 연속 전석 매진'이라는 글자를 무색할 정도로 현장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그 화제의 중심에 있는 '향연'은 기획만 보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국립무용단 창단 이래 지속적으로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대표적인 전작이 배정혜 전 예술감독의 '코리아 환타지'인데, 이 작품은 이미 국립무용단의 해외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 됐다. 이후로 국립무용단은 '정오의 우리춤' 같은 상설공연이나 특별공연을 통해 소품작을 모은 공연을 선보였다. 어느 무용단체나 쉽게 시도하는 형태의 공연이고, '향연'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여타 작품들과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가로 참여했다는 점에 있다. 무용의 장르적 특성상 안무가와 연출가를 구분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연출의 역할과 경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적어도 무대와 의상은 온전히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초연 당시 국립무용단에는 예술감독이 부재했고, 우리 춤의 대가 조흥동, 김영숙, 양성옥이 이 작품의 안무가로 참여했다.


안무가 안성수와의 인연으로 무용계에 발을 디딘 정구호는 그간 꽤 성공적인 작업을 많이 완성했다. 국립발레단 '포이즈'나 안성수와 작업한 'Two in Two', 그리고 국립무용단 '단' '묵향' '향연'까지. 이만하면 무용계의 니즈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국립무용단의 작업도 꽤 성공적이었다. '단'에선 파격을, '묵향'에선 한복을 토대로 네오클래식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향연'은 그 자체로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춘 공연이다. 우선, 흔치 않은 대형 전막 작품이라는 점이 그렇다. 4막 구성에 포함된 춤은 12종류(2016년 공연 당시 13종류)이고, 출연진은 50여 명에 이르며, 의상과 소품이 수백 벌에 달한다. 예산도 어마어마하게 쓰였다.


규모에 응하기라도 하듯 무대는 무척 아름답다. 여러 색과 문양이 섞여있는 궁중의 복색에서 대부분의 색을 제거하고 단색화를 보는 듯 단정하게 구성했다. 민속무용과 종교무용의 의상도 하나의 색을 설정하고 그에 맞게 새로 디자인했다. 별다른 장식과 꾸밈없이 조명과 몇 개의 스크린, 대형 매듭으로 구성한 무대도 인상적이다.


실제로 공연을 본 관객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대부분 아름다움에 한 번 반하고, 그 대상이 우리 전통무용이라는 데서 두 번 감동한다. 때때로 "우리 춤이 이렇게 아름다웠냐"라며 감탄한다. 누군가는 그동안 이런 걸 안 하고 뭐 했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향연'은 성공한 작품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겁이 날 정도로 쏟아지는 호평일색 속에서 몇 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도 있다.


우리는 '향연'을 당당하게 우리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전통은 보존해야만 하는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를 거치며 새롭게 전승되어야 하는 유동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새롭게'의 조건은 부합하지만, '전승'에는 다소 어긋난다. 사실 그보다 이 '무용'작품은 한 편의 쇼 엔터테인먼트나 패션쇼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전통을 재해석했다고 하지만 춤사위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준 시각적인 부분에 비하면 아무런 '재해석'이 가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주얼이 압도하는 바람에 춤은 구색 맞추기에 그친 셈. 시대에 맞는 해석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춤과 형식도 그 점이 드러났어야 한다. 반대로, 시각적인 부분에 변화를 가미하고 춤은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면 아무리 대형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모든 종류의 춤을 군무의 형태로 구성하지 말았어야 한다. 각각의 춤에 맞는 형식이 있는 법이다.


일례로, 1막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정재에는 새로운 해석이 분명하게 엿보인다. 흔히 연주되던 태평소의 소리가 사라지고 음악의 번잡한 부분을 걷어내 오롯이 움직임만 돋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는 2막과 3막에선 찾아보기 어렵고, 4막에선 다시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2016년 재공연 당시 초연에는 없던 살풀이춤이 추가됐고, 2017년 재공연에선 이미 공연된 승무를 제외했다. 처음부터 의미를 신중하게 고민한 구성이라면 새로운 춤을 추가하거나 이미 완성한 안무를 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남성무용수로만 구성된 1막 '제의' 장면에선 올해 여성무용수가 추가됐다. 단순한 춤이 아닌 제례 형식을 띤 장면이기에 여성무용수를 투입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특히, 정구호 연출은 초연 당시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양과 음의 조화가 아닌 '양'의 극단으로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약과 적, 두 가지 의물 중 하나만 선택했고, 의상과 소품 모두 흑과 백으로만 구성해 양의 극단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연거푸 재공연을 거치며 작품이 강조하는 의도가 퇴색하지 않고 존중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국립무용단은 '향연'을 처음 올리면서 '이것이 우리의 춤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과연 그러하냐고, 반문해보고 싶다. '향연'은 우리 전통의 멋을 살린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우리의 춤을 온전히 대변할 수는 없다. 공연이 흥행하고 많은 관객이 전통무용에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다만 모든 전통무용이 이렇지 않고, 이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무용계를 강타한 신드롬에 관객의 반응을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일회성 공연을 쏟아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향연'은 하나면 족하다. 일간지에서 현상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반면, 이렇게 평론가의 비평이 없는 공연도 이례적이다.


국립무용단 '향연'(사진=전강인/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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