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 Live 상영 준비 과정
상영작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한글 자막은 누가 입히는 걸까? 국립극장 NT Live를 담당하고 있는 프로듀서의 안내에 따라 그 과정을 짚어봤다.
너비 22.4미터, 깊이 23.4미터, 높이 11.5미터. 어떤 공연도 품을 수 있는 널따란 해오름극장 무대가 영화 상영관으로 변신합니다. NT Live가 상영되는 단 일주일, 극장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게 되죠.
2014년 국내 최초로 한국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이 영상으로 담아낸 명작 연극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여타 공연 영상화 사업과 다르게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뿐 아니라 바비컨 센터·브리스틀 올드 빅·영 빅 등 자국 내 여러 극장의 훌륭한 프로덕션을 고루 다룬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지금에야 극장에서 공연이 아닌 영상을 감상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첫 상영 당시만 해도 극장 무대에서 영상을 상영한다는 자체가 생소했죠. 그래서 ‘워 호스’를 처음 선보인 2014년에는 NT Live가 실제 공연이 아니라 녹화한 영상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답니다.
영국 국립극장에서 제작한 영상이 대서양을 건너 한국 국립극장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칠까요? 영화를 수입·배급해서 상영하는 일반적인 과정을 연상하면 될 터인데, 이곳은 여느 영화관이 아닌 ‘극장’이기 때문에 그 절차와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공연을 제작할 때와 다르고, 영화를 상영하는 과정과는 또 다른 NT Live. 상영작 선정부터 스크린에 오르기까지의 기록을 차근차근 따라가 봅니다.
많은 분이 기다리는 차기 상영작은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오픈 시기에 맞춰 결정됩니다. 시즌 프로그램과 동시에 NT Live 상영 일정과 작품도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죠. 국립극장 NT Live는 보통 시즌 오픈을 앞둔 8월과 마당놀이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하반기 시즌을 시작하기 직전인 2월에 편성됩니다. 일정이 조정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2016-2017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박스오피스에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프랑켄슈타인’ ‘제인 에어’ 4편이 걸렸습니다. 현재 상영 가능한 NT Live 작품은 20여 편인데요. 일부 작품은 더는 상영하지 않지만, 신작 역시 쉬지 않고 제작하고 있다고 하네요. 한국에서의 상영작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궁금하시죠?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넓게 보자면 한국에서 상영할 작품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연계에서 이슈가 된 작품이면서, 시의적절해야 하고, 작품성이 뛰어나야 하며, 무엇보다 1천 석이 넘는 광활한 해오름극장을 채울 수 있는 규모의 프로덕션이어야 합니다. ‘워 호스’는 톰 모리스의 연출력과 작품성만으로 화제를 모으며 첫 상영작으로 선정하기에 손색이 없었죠. 2016년 베니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햄릿’은 배우의 인지도뿐 아니라 시기상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이슈가 맞물렸습니다. 이에 ‘햄릿’과 ‘코리올라누스’를 커플링해 셰익스피어를 기리기 위한 기획을 마련하기도 했죠. 국립극장에서는 매 시기 신작과 재상영작을 각각 1편씩 묶어 상영하는데요. 지난 2월엔 원작 소설의 힘이 뛰어난 신작 ‘제인 에어’와 함께 인기작 ‘프랑켄슈타인’의 재상영을 진행했습니다.
물론, 작품 제목과 제작진 명단만 보고 상영을 덜컥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몇 작품을 선택해 스크리너 카피(Screener Copy)를 받아 감상하는 과정이 선행됩니다. ‘스크리너 카피’란 실제 상영본과 동일한 내용의 저해상 영상인데요. 상영 후보작을 몇 편 선택해 스크리너 카피를 먼저 받아보게 됩니다. NT Live는 그 자체가 ‘이미 제작된’ 작품이기에, 실패할 확률이 낮은 상영작을 선택하기 위해 무수한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 이렇게 상영 일정과 작품이 결정되면 영문 대본을 받아 번역 작업에 들어갑니다. 한 작품을 번역하는 데 대략 한 달 남짓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영이 결정되는 즉시 자막 번역을 가장 먼저 의뢰하게 됩니다. 전문 번역가는 영문 대본과 스크리너 카피를 토대로 번역 작업을 하게 되는데요. 영화에 비해 연극은 대사가 많고,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의 경우 문학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문장이 많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한 번역이 요구됩니다. 러닝 타임이 무려 세 시간에 달하는 ‘햄릿’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자막을 만들기 위해 문장을 끊고 싱크를 맞추는 작업이 무척 고됐답니다. 이렇게 완성된 한글 자막은 실제 상영 전까지 컴퓨터에서 수십 번 재생됩니다. 오탈자를 확인하고 오류를 잡아내는 과정이죠.
2014년부터 지금까지 특히나 ‘자막’에 관한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요. 첫 상영 당시 자막은 스크린 상단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객석 단차가 크지 않은 해오름극장이기에 모두가 수월하게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자막 위치를 잡은 것이죠. 그러나 실제 상영 후, 해오름극장 무대를 가득 채운 스크린이 너무 큰 나머지 자막을 읽기가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후 ‘코리올라누스’와 ‘리어왕’을 상영하면서 자막의 위치를 독립영화 상영관이나 영화제에서 종종 사용되는 오른쪽 세로 형태로 바꿨는데요. 셰익스피어 극의 특성상 대사가 너무 길고 많아서 이 또한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단점이 있더군요. 여러 피드백 과정을 통해 스크린 투사 지점을 조정하고 영상 내 자막의 위치를 수차례 조정한 끝에 하단 중앙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스크린도 마찬가지입니다. 2014년 ‘워 호스’를 본 관객 중에는 지금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예리한 분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첫 상영 때는 극장이 보유한 리어스크린을 사용했으나 현재는 NT Live 상영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스크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돌돌 말아져 있는 이 스크린은 상영 때만 그 광활한 자태를 드러내는데요. 기존의 리어스크린에 비해 선명도가 뛰어나고,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 있어 음향을 전달하기에도 효율적입니다.
상영을 하루 앞둔 날, 오전부터 무대 위에선 스크린 설치 작업이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사각으로 트러스트를 조립하고 나면, 그 위에 스크린을 펼쳐 꼼꼼하게 바느질하듯 골조와 천을 엮어나갑니다. 가로 15미터, 세로 8.4미터 크기의 스크린이 트러스트에 고정돼 팽팽하게 당겨지면 상영을 위한 기본 준비가 완료됩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진 설치 작업이 끝나면 시험 상영이 시작됩니다. 상영을 보름 정도 앞두고 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블루레이 영상이 드디어 해오름극장에 띄워지는 순간입니다. 음악과 대사는 잘 들리는지, 화면의 조도는 적당한지, 자막은 선명하게 잘 보이는지, 영상이 끊기거나 튀는 부분은 없는지…. 배우의 대사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자막의 싱크를 조정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연극 공연의 특성을 십분 살리려면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 무대 위 장면과 자막이 한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시험 상영은 작품당 최소 3회 이상 진행됩니다. 객석을 돌아다니며 쉬지 않고 영상을 집중해서 봐야 하니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상영이 끝나면 영국에서 날아온 블루레이는 다시 바다를 건너 돌아갑니다. 저작권과 복제에 관한 부분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조금 번거롭지만 실물 디스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작품을 재상영하더라도 매번 ‘한국 국립극장’의 라벨이 부착된 새 블루레이 디스크를 보내주는데, 상영이 끝나고 반납한 디스크는 영국에 도착하면 폐기된다고 하네요.
NT Live를 상영하는 과정은 공연을 기획하는 프로듀서와 영화 프로그래머 두 역할을 모두 요구하는 일입니다. 상영이 끝나면 수익 배분을 위한 결과 정리와 동시에 다음 상영작을 선정하기 위한 프로그래머의 역할로 돌아갑니다. 한국에 NT Live가 상영된 지 햇수로 4년, 더 좋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고민이 많습니다.
2014년 도입 당시부터 지금까지 NT Live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공연기획팀 김영숙 프로듀서는 “이제는 ‘국립극장’ 하면 NT Live 신작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과 함께 고정관객도 생겨 뿌듯하다”라며, “과정이 힘들어도 티켓만 잘 팔리면 아무리 긴 자막이라도 몇 번이고 돌려볼 준비가 돼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작품을 더 멋지게 선보이기 위한 고민은 계속됩니다.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
※국립극장 「미르」 2017년 3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