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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r 22. 2017

다름에서 새로움으로

국립무용단 ‘회오리’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국립무용단이 이 시대에 가져야 할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다. 2014년 초연한 ‘회오리’를 통해 그 변화를 목격했다.



오묘하다. 이사도라 덩컨이 입었다던 그리스 튜닉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 푸른 안개를 가르고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 같은 몽환적인 황금빛 무대.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국악기의 선율과 소리꾼의 울림.


국립무용단 ‘회오리’는 경계에 서서 ‘다름’을 ‘새로움’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한국의 춤사위와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의 움직임이 어우러지고, 전통 국악기를 손에 든 비빙의 연주자들은 기존의 관행을 벗어나는 새로운 연주를 선보인다.


테로 사리넨의 움직임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연(nature)과 자연적인(natural) 것을 추구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핀란드의 지리적 환경과 서양무용뿐 아니라 일본 부토와 중국 경극 등 동양예술을 배운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맑고 은은하며 생기가 넘치는 테로 사리넨의 움직임은 국립무용단의 춤사위와 만나 시너지를 발휘했다. 정중동과 동중정으로 대표되는 한국춤의 호흡을 머금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댄스플로어 위에 넓고 깊게 펼쳐지는 하체의 움직임, 공기를 가르고 바람을 타며 자유롭게 확장되는 두 팔의 생동.

이렇게 형성된 독특한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 ‘회오리’는 75분간 객석에 새바람을 불어넣는다. 손끝에서 팔목으로, 상체의 분절에서 온몸으로 확장되는 움직임. 이윽고 독무에서 군무로 퍼져나가며 물결을 이룬다. 시간을 늘린 듯한 움직임은 민첩함과 날렵함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한다. 이윽고 이승희의 소리와 무용수의 손목에 달린 방울의 울림, 부챗살을 꼭 닮은 의상에서 일으킨 바람소리가 관객의 청각을 깨운다.


음악감독 장영규를 필두로 한 비빙은 몽환적이고 제의적인 춤사위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숨결을 불어넣는다. 불교음악·굿음악 등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작업을 선보여온 비빙의 음악은 ‘회오리’의 본질과 궤를 함께하고 있다. 가야금·피리·해금·타악 등 우리 악기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리와 목소리는 전형적인 제의의 얼굴을 씻고 말간 표정으로 객석을 바라본다.


미키 쿤투의 조명과 무대는 시각적인 독창성을 완성했다. 가로폭이 긴 해오름극장을 십분 활용한 무대에 얹어진 빛과 어둠의 대비가 돋보이는 조명은 무용수의 춤을 가장 세련되게 보이도록 한다. 한복과 부채에서 영감을 얻은 에리카 투루넨의 의상은 무용수의 동작이 돋보일 수 있도록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한국적 미감을 살렸다. 한복의 치맛자락을 살짝 걷은 듯 레이어를 강조한 블랙 의상이나 부챗살의 특징을 부각한 남성무용수의 의상도 재미있다.


국립무용단은 실험과 시도 속에 탄생한 다채로운 스타일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가운데, 그 사이 해외안무가와 협업한 전막 작품을 두 편이나 내놨다. ‘전통에 기반을 둔 창작’을 기치로, ‘묵향’ ‘향연’으로 대표되는 전통 춤사위와 ‘회오리’ ‘시간의 나이’ 등 컨템퍼러리 댄스를 모두 섭렵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국립무용단이 이 시대에 가져야 할 필수 불가결의 조건인데, 그 도전의 결과와 시대에 따른 변화는 ‘회오리’를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2014년 초연된 국립무용단 ‘회오리’가 오는 3월 돌아온다. 국립무용단 최초 해외안무가와의 작업으로 오래도록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첫선을 보인 2014년 4월은 예술을 순수하게 바라보고 읽을 수 없는 슬픔의 나날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누군가는 치유를 받았고, 누군가는 제의의 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2015년 10월 국립극장에서 재공연하고 11월엔 프랑스 칸에서 열린 2015 칸 댄스 페스티벌 개막 무대를 장식했다.


국내에서 두 번 공연하고, 프랑스 무대도 한 차례 밟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로 사리넨은 국립무용단과 협업한 유일한 해외안무가였으나, 2016년 조세 몽탈보와 함께한 ‘시간의 나이’로 ‘해외’를 바라보는 국립무용단의 자세도 변화했다. 테로 사리넨과 조세 몽탈보, 두 사람은 ‘해외안무가’라는 범주는 동일하지만 작품의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시간의 나이’가 네오클래식이라면, ‘회오리’는 컨템퍼러리 댄스다. 2017년, ‘시간의 나이’를 경험하고, 해외 관객도 만나고 온 ‘회오리’가 더욱 기대된다. 초연 당시 엿본 일말의 어색함은 이제 국립무용단만의 스타일로 완전히 치환됐을 터. ‘회오리’의 세 번째 재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안무가 테로 사리넨과 이야기를 나눴다.



‘회오리’는 2014년 초연 이후 국립극장과 프랑스 칸에서 한 차례씩 재공연을 진행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작품이 흥행할 것이라 예상했는가.


처음 작업하는 단체와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는 어느 누구도 결과물을 예측하기 어렵다. 다행히 국립무용단 단원들과 만난 첫날부터 상당히 긍정적인 기운이 느껴졌고, 작업하는 내내 우리의 연습실에선 특별한 불꽃이 강렬하게 번쩍였다. 재공연을 위해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제는 농담도 주고받으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마 작품에 이러한 부분이 드러날 것이고, 관객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작품과 이를 위해 협업한 모든 예술가가 굉장히 자랑스럽다. ‘회오리’의 수명은 길 것이고, 길어야만 한다.


2015년 재공연에선 초연보다 무용수의 규모를 줄이고 캐스팅도 변경했다. 이번 공연 역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재공연을 할 때 무용수의 수를 줄인 것은 향후 ‘회오리’가 해외 투어를 다닐 때를 생각해 용이하도록 한 것이다. 무용수는 줄었지만 작품의 본질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2015 칸 댄스 페스티벌에서 호평 받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공연을 준비하면서 몇몇 장면을 집중적으로 손봤다. 애초부터 어딘가 완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어 계속 신경이 쓰인 장면들이 있었다. 몇몇 장면의 길이를 줄였더니 연결이 한결 매끄러워졌고, 전체적인 개연성도 높아졌다. 또 한 번 ‘회오리’를 ‘업데이트’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초연 이후 몇 년간 캐스팅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무대를 채우는 다수의 캐스팅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공연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 작품에 있어 특별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각자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으로 작품에 새로운 요소를 투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기쁘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느 역할도 완전히 대체 가능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만들어놓은 배역에 새로운 무용수가 투입되었을 때, 그 무용수는 자신의 방식으로 춤추고 해석할 여지를 갖게 된다. 나는 매 공연 한국을 찾아 새로운 무용수를 캐스팅하는 자리에 꼭 참석하려고 한다. 그들이 작품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작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보고 싶다. 작품 전반에서 무용수들이 의도적으로 양손을 크게 벌리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무용수들이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도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각자가 가진 잠재능력과 최대의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힘쓴다. 과도하게 벌린 팔과 가슴은 아주 팽팽하게 조율된 악기의 현처럼 투명하면서도 쉽게 깨질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체는 무게를 충분히 실어 땅을 향하고, 상체는 공기를 머금은 듯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작품에서 무용수들이 종종 두 팔을 ‘눕힌 S자’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동작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마치 무한대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때로 뫼비우스의 띠가 떠오르며, 한국의 태극문양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만들어진 어떤 상징을 차용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작품을 만들 때 무한하게 변화하는 이 세상의 동식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모든 상징은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 그저 우리는 그것들을 재활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시작과 끝을 열고 닫는 송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헌트’ 속 당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혹시 이 무용수에게 안무가 자신을 투영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다. 춤은 언제나 고대 혹은 원시의 무언가를 추적해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춤은 우리의 DNA와 닿는 어떤 연결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작품에 종종 제의적이고 부족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회오리’가 샤머니즘적인 목소리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직관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최근 들어 당신은 영상과 테크놀로지, 3차원적인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립무용단과의 작업에 다시 자연과 원초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회오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으로 라이브 음악과 춤이 만나는 지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 만남은 자양과 활기로 가득하고, 자율적이면서 치유의 가치까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비빙의 연주자와 국립무용단 무용수 사이의 현장감 넘치는 상호작용은 아주 만족스럽다. 두 번째로, 나는 이 작품이 상당히 시각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조명 디자이너 미키 쿤투와 의상 디자이너 에리카 투루넨 덕분이다. 세 번째로,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고대와 원시로 돌아가 자연을 이야기하는 안무가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늘 춤을 추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왜 춤을 춰야 하는가.


춤은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다. 움직임은 나의 언어이며, 유일하게 가장 진실한 형태의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춤을 통해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 명명되지 않은 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이런 부분에서 안무가는 실질적으로 책임감을 갖는 동시에 커다란 기회를 얻게 된다고 본다. 춤은 경계 없이 쉽게 닿을 수 있기에 사회에 큰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젊은이들이 새로운 춤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다. 우리 사회에 관용의 정신을 퍼뜨리기 위해 무용을 통해 전통을 혼합하고 여러 문화 간 상호작용을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회오리’

일시          2017. 3. 30(목)~4. 1(토)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
장소         해오름극장
관람료       VIP석 7만 원,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국립극장 「미르」 2017년 3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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