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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Jun 06. 2017

새로운 무용극의 탄생

‘리진’ 미리보기

2016-2017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국립무용단의 신작 ‘리진’. 오늘날의 무용수들이 100여 년 전 궁중 무희의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낸다.


제2대 주한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의 눈으로 기록한 조선 견문록 ‘한국에서(En Corée)’. 188쪽 분량의 책에 조선의 날씨부터 식생활, 풍수지리 사상, 놀이문화, 풍습, 종교까지 푸른 눈에 포착된 다채로운 풍경이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출간된 번역본의 서른다섯 번째 장 ‘궁중의 기생들과 한 한국 여인의 비극’을 펼치면 우리가 찾는 ‘리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궁중에 직속된 기생들은 그 빼어난 미모로 인해 다른 여인네들과 금방 구분되는데, 유럽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네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국립무용단 신작 ‘리진’은 여기서 시작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완성된다. 한 세기 전 기록은 새로운 창작 과정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게 될까. 안무를 맡은 국립무용단 김상덕 예술감독은 우리 무용, 한국춤의 시작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던 중 구한말 조선의 시대상에서 현시대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끌어냈다.


리진 역 이의영(왼쪽)과 도화 역 박혜지(오른쪽)


무용가의 눈으로 조선의 궁중 무희를 바라보다

이 생경한 나라를 처음 찾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눈을 떼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궁중 무희’였다. 숱한 무희들 사이에서 옥빈과 뛰어난 춤으로 주목받은 두 여인, 리진과 도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은 공간의 변화를 따라 총 3막으로 구성된다. 조선의 궁궐을 배경으로 한 1막, 리진이 플랑시와 함께 떠난 프랑스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다룬 2막, 그리고 3막에 이르면 갈등이 극대화되며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막이 오르면 리진과 도화의 꿈속이 펼쳐져 있다. 도화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함께 자란 리진을 누구보다 아끼고 챙기지만, 리진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꿈에서 깨어나니 여러 나라의 대신들이 모인 연회장이 펼쳐져 있다. 익숙한 풍경 속 플랑시의 등장은 변화를 예고한다. 궁중 무희들의 지배자로서 리진을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은 원우와 그를 유혹해 권력을 손에 넣고자 꿈꾸는 도화. 어둠이 내려앉은 밤, 궁을 둘러싼 네 사람의 이해관계는 점점 더 복잡하게 뒤틀린다.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고, 리진은 플랑시와의 사랑을 선택해 프랑스로 떠난다.


신비로운 분위기, 모든 것이 새로운 신세계. 그곳에서 리진은 플랑시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신세계의 사람들은 리진의 아름다운 춤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리진은 낯선 환경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탓에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으로 귀환하지만 이내 원우의 계략에 빠져 위기에 처하게 된다.


리진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동안 도화는 원우와 음모를 꾸며 왕비를 시해하고 그 자리에 올라선다. 현실과 신세계를 넘나든 리진과 플랑시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일까. 플랑시는 원우의 검에 쓰러지고, 리진도 결국 자결하고 만다.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두 여인의 꿈속 장면은 작품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해오름극장의 회전무대와 넓은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장면을 한데 배치했다. 이를 통해 관객은 극적 상황을 다각도로 관찰할 수 있어 작품의 서사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객석에서 바라볼 때 무대의 오른편은 신세계, 왼편은 조선으로 설정하고, 사각 프레임과 곡선 띠 형태의 LED 패널을 무대 세트로 활용해 공간적 구분을 두었다. 움직임이 진행됨에 따라 자연스레 시공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춤’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숙지하지 않아도 무용수의 춤사위와 표현을 통해 인물의 심리는 물론 상황과 갈등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무용수 손끝과 발끝의 미세한 움직임, 시선의 섬세한 변화만으로 극 전체의 서사와 표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점이 무용극의 매력이다. 누구보다 이에 능숙한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기에 기대를 감출 수 없다. 여기에 다양한 효과음과 각 캐릭터에 부여된 음악적 테마가 극적 상황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정승호가 디자인한 ‘리진’의 무대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진 캐릭터

“리진(Li-Tsin)의 빛나고 깊은 눈동자만이 마치 영혼의 꽃인 양 빛나면서 그녀의 개성을 지켜주고 있었다. (…) 그 공사(公使) 남편은 황홀히 매료된 나머지 눈을 감고 그 운율이 넘치는 언어―그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발하는 언어들은 열정적이고 정선(精選)된 말로서, 놀라운 색채를 지닌 이미지들을 펼쳐주곤 했던 것이다.” 
-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중에서 


리진은 궁중 최고의 무용수이자 연약한 외모와 달리 사랑이라면 과감하게 목숨까지 바치는 여인이다. 기록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미색과 예인의 면모를 두루 갖췄을 터. 가장 중요한 이 배역에 아름다운 춤 선과 연기력이 돋보이는 이의영과 이요음이 발탁됐다. 긴 팔다리로 그려내는 힘 있는 선이 돋보이는 이의영은 맏언니처럼 당찬 리진의 모습을, 새하얀 피부에 까맣게 반짝이는 큰 눈으로 이지적인 면모를 풍기는 이요음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를 향해 나서는 주인공의 패기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리진과 함께 궁중 무희로 자라면서 언제나 그녀를 챙겨주고 보호하면서도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어떤 선택도 불사하는 도화 역에는 장윤나·박혜지가 캐스팅됐다. 국립무용단 무용극에서 다수 주역을 맡으며 내공을 쌓은 장윤나는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고고하면서도 고뇌와 야망을 동시에 품고 있는 팜파탈을 그려낸다. 젊음의 생기를 가득 머금은 박혜지는 순수하면서도 야심을 가진 캐릭터의 양면을 흥미롭게 표현해낼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대비되는 공간, 신세계에서 온 플랑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는 순애보의 인물이자 당대 조선의 남성과 다르게 여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인물이다. 플랑시 역에 캐스팅된 황용천과 조용진은 개성이 돋보이는 각자의 춤만큼이나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플랑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리진에 집착하는 궁중의 권력자 원우 역은 송설, 비운의 왕비 역은 조현주가 맡았다.


한국 무용사에 있어 신무용기의 시대적 사명을 안고 창단한 국립무용단은 여러 예술감독 체제 아래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천변만화하는 중에도 그 기둥은 한국 근현대 예술사의 시작점인 ‘무용극’ 위에 튼튼하게 세워져 있다. 새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선보이는 신작 ‘리진’은 국립무용단의 독보적인 춤을 오랜만에 선보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역사적 기록을 품은 새로운 무용극의 탄생에 많은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photographer BAKi


국립무용단 ‘리진’

일시 2017. 6. 28(수)~7. 1(토)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
장소 해오름극장
관람료 VIP석 7만 원,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국립극장 「미르」 2017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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