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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y 11. 2017

하나를 위한 열정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에게 듣는 오케스트라 아시아의 기억

1993년 창단된 오케스트라 아시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역사의 한 장면 속에 있었던 김영미(해금)·문양숙(가야금)·조화상(피리) 단원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위에서부터 문양숙·조화상·김영미 단원 (사진=전강인/국립극장)


1990년대 기록을 보면 ‘아시아 민족악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더군요.

김영미 시작은 한・일 합동연주였어요. 1987년에 중앙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고 이듬해에 일본 연주를 다녀왔거든요. 1989년엔 서울과 광주·전주·대구에서 중앙국악관현악단과 일본음악집단의 합동연주가 열렸어요. 한국과 일본이 음악적으로 친했죠. 이때 ‘아시아 민족악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요.


처음부터 삼국이 모인 것이 아니라 일본과 먼저 손을 잡은 거네요. 어떤 계기로 오케스트라 아시아가 결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조화상 박범훈 선생님과 일본음악집단의 미키 미노루 선생님이 함께 해보자고 이야기하면서 시작됐어요. 중국도 함께 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라 방문할 수도 없었죠. 그래서 박범훈 선생님이 보따리장수로 위장해서 중국에 넘어갔어요. 무조건 ‘하자!’라는 생각뿐이었죠. 당시에 중국의 중앙민족악단 류원진 단장도 한·중·일 합동악단 구상을 듣고 좋다며 동의했지만 외교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실현이 불가능했던 거예요.

김영미 그리고 1992년 8월에 우리나라와 중국 간 수교가 체결되면서 물꼬가 트였죠. 그해에 박범훈·백대웅 두 분과 연주자 두 명이 중국에 다녀왔어요. 호텔에 투숙하면서 일주일 정도 가야금 하는 친구는 쟁, 저는 양금을 배웠어요. 두 선생님은 중앙민족악단에 우리 악기를 알려주러 갔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중국의 현란한 주법에 입이 떡 벌어지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는 함께 해보자고 설득하고 왔죠.


표준화된 서양 악기도 아니고, 어떻게 한·중·일 전통악기로 구성된 악단을 구상하게 된 걸까요.

김영미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주도한 박범훈·백대웅 두 선생님은 늘 우리 음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특히 백대웅 선생님은 우리가 정확한 음정을 연주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죠.

조화상 소리만 듣고 음을 정확하게 맞힐 정도로 백대웅 선생님은 절대음감의 소유자였거든요.

김영미 두 분이 의기투합해서 우리 음악이 왜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셨어요. 선진국의 음악에 대해 열려 있었고, 유학 시절 유럽에서 일본의 고토 음반이 몇 만 장씩 팔리는 걸 보면서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갈증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노력 끝에 1993년 9월, 장충동 타워호텔에서 창단식을 하고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기념 공연을 열었고요. 연주회를 며칠 앞두고 호흡을 맞췄다고 들었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화상 처음 만나서는 엄청 고생했어요. 우리 악기로는 중국과 일본이 소화하는 음정을 낼 수가 없는 거죠. 가야금엔 그 음을 낼 수 있는 줄이 없고, 피리엔 구멍이 없으니까.

김영미 제일 힘들었던 건 한국 연주자들이었어요. 창단연주회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방금 피아노로 들려준 소리를 내가 연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연습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그때 박범훈 선생님은 제 뒤에서 “딸아, 그게 그렇게 어려우냐. 그렇게 어려워?” 하시더군요.

조화상 왜냐면 그때까지 우리가 기본 음정으로 연주하던 것이 C·D·D♭·E♭·G·A♭·B♭ 정도니까… 악기의 한계를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미 중국은 17현금과 21현금을 사용하고 있었고, 일본도 17현·20현 고토를 썼어요. 게다가 중국은 악기 두 대를 기역자 형태로 놓고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연주하더라니까요. 그래서 그걸 보고 우리도 저런 악기를 만들자, 줄의 수를 늘려서 음악을 풍부하게 하자, 했던 것이 악기 개량으로 이어진 거죠.

문양숙 재일교포인 저는 그런 상황을 모르고 한국으로 유학을 왔죠. 박범훈 선생님이 어느 날 제 손을 잡고 갈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간 곳이 중앙국악관현악단이었어요. 연주자들이 다들 저를 이상하게 봤죠. 개량악기를 연주하니까요. 저는 오케스트라 아시아에 통역으로 참여했는데 차마 전달할 수 없는 이야기가 오갔어요. 서로가 서로의 음악적 사정을 모르니까 하는 말들이죠. 중간에서 국가적인 싸움이 될까 봐 온전히 통역하지도 못하고… 진땀 뺐죠. 보통 연습이 끝나면 호텔방에 들어가서 쉬고 그러잖아요. 오케스트라 아시아는 그러지 않았어요.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우리 연주자들은 억울하니까 토론하고,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이게 왜 연주가 안 되냐며 따져 묻고.

조화상 나라별로 다른 것도 참 많았는데, 당시 중국 연주자들은 오선보를 못 읽더라고요. 그들은 악보를 숫자로 바꿔서 사용했어요. ‘도레미파솔’이 ‘12345’예요. 악보가 나오면 담당 악보계가 그걸 가져가서 숫자로 바꾸는 거죠. 다른 연주자들보다 하루의 시간이 더 필요해요. 사용하는 악보가 다르니까, 합주를 하면 어디를 연주하고 있는지 짚기가 어려운 거예요. 창단한 지 2년쯤 지나고 중국 연주자들이 젊은 친구들로 바뀌었는데, 다행히 오선보를 볼 줄 알더라고요.

문양숙 심지어 잘생기기도 했죠.

김영미 그때 중국 연주자들한테 푹 빠져서 레슨 받겠다고 중국악기도 엄청 구입하고 그랬어요(웃음).

문양숙 그렇게 한·중·일 간에 신경전이 오가는데, 저는 다른 나라 연주자들이 우리 홀수 엇박을 연주 못 하는 게 그렇게 통쾌하더라고요. 우리 시김새와 장단을 특히 어려워했어요.


악기의 뿌리는 같지만, 단순히 ‘아시아’로 묶기엔 음악적 차이가 컸던 것 같네요.

김영미 한 3~4년은 엄청 고생했어요. 특히 한국 연주자들은 소리가 나질 않아서 많이 위축됐어요. 그렇게 해서 1995년부터 악기를 개량하기 시작했어요. 줄이 많아지긴 했지만 연주자들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많이 했죠.

문양숙 1993년 창단부터 1995년까지는 12현가야금으로 연주에 참여했어요. 이후엔 우리도 개량가야금을 썼죠. 그런데 오랫동안 5음계만 연주하다가 7음계로 전환하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반음을 빠르게 짚는 게 어려우니까요. 악기는 바뀐 데다가 느린 일본음악과 빠른 중국음악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조화상 그때는 평균율조차 정리가 안 된 시기였어요. 당시의 서양 오케스트라에서는 440㎐를 썼는데, 중국은 442㎐거든요. 같은 음을 연주해도 다르게 들리는 거죠. 또 일본과도 1㎐ 차이가 났거든요.

김영미 이 기준점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를 놓고도 신경전이었어요. 나중엔 442㎐에 맞추긴 했지만요. 관악기나 현악기는 어떻게든 조율이 가능한데, 생황은 음을 바꿀 수가 없어서 중국의 기준으로 통일했죠.

문양숙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양보가 가능한 사람들이었어요. 한국·중국·일본의 연주자들이 모두 ‘절대 안 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우리도 한번 시도해볼게’ 했거든요.

김영미 그렇게 살벌하게 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음악의 색깔이 다른 세 나라가 만나서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잖아요. 좋은 음악, 완벽한 음악을 만들기 위한 음악가들의 자존심 대결이었던 거죠.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열정이 가득했어요.


그렇게 세 나라의 연주자들이 합심해 만든 음악은 어땠을까요. 그 소리가 궁금해지네요.

문양숙 저는 통역으로 참여하면서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언니오빠들 보며 꼭 저 무대에 서겠노라 다짐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 조합 자체가 너무나 새로웠어요. 북한에서 합주를 많이 해봤지만, 한·중·일이 함께 만드는 하모니는 생전 처음 들었거든요. 매료됐죠. 특히 1994년 창단연주회에서 초연된 ‘남도아리랑’(작곡 백대웅)을 잊지 못해요. 시작 부분에 “다라~” 두 음만 들어도 죽어요.

김영미 돌이켜보니 천상의 소리였던 것 같아요. 함께 연주한 ‘남도아리랑’의 첫 마디를 떠올리면 지금도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아요.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죠.

조화상 지금 다시 연주해도 그 음악은 아마 안 나올 거예요. 김영미 당시에 나라별로 두 작품씩 연주했는데, 자국의 곡은 그 나라의 지휘자가 맡아서 했거든요. 하나의 공연에 세 명의 지휘자가 등장한 거죠. 그중에서도 박범훈 선생님은 특히 감성이 풍부한 지휘자였어요. 감성을 담은 그의 지휘봉 끝에서 중국·일본 연주자의 음악도 마구 놀아요. 중국 연주자들은 ‘남도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곡을 연주하면서 한국음악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들어요. 가슴을 쑤시는 음악이라는 거죠. 중국은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기조 때문에 음악이 점점 빨라지고, 악기를 개량하면서 민족의 얼이 사라졌다고들 해요. 그런데 한국의 음악에는 그 얼과 혼이 살아 있고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그래서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악기 개량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아시아가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할 것 같아요.

조화상 오케스트라 아시아 활동의 일환으로 우리 극장에서 중국 연주자를 초빙해서 쇄납(쏘나)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우리가 중국에 가서 얼후를 배우기도 하고요.

문양숙 1998년에는 저와 채윤정 단원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중국에 다녀왔죠.

김영미 일종의 해외 교환 프로그램이었어요. 오케스트라 아시아가 창단하고 교류가 활성화된 거죠. 전통음악만 배우며 자란 세대가 창작음악을 알게 되고, 이걸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예요. 이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고 악기 개량 사업을 시작한 건 당시 국악계에선 이단과 같은 일이었어요.

조화상 활동하면서 우리도 많이 발전했어요. 넓은 시장에 나가서 보고 배우는 것이 많거든요. 하물며 매너와 옷차림도 그렇고요.

김영미 그런 것들이 자극이 돼서 한국에 돌아오면 자기계발을 하게 되더라고요. 세 나라가 모이니까 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은 음반을 들고 와서 개인 홍보를 했어요. 방식이 아주 세련됐죠. 우리도 그걸 보고 다음번에 해외 나갈 때면 음반도 챙겨 가고 그랬어요. 그걸 다리 삼아 개인적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해외 활동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고요. 점차 아시아 음악 시장도 넓어지는 거죠.


이번 정기연주회가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상기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관객들이 이번 연주를 통해 어떤 감흥을 얻길 바라는지 궁금합니다.

김영미 우리 연주자들 스스로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 ‘베스트 컬렉션Ⅲ-오케스트라 아시아’를 통해 그 뜨거운 열정이 드러날 것 같아요.

문양숙 얼마 전에 지휘자 이나다 야스시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전해줬어요. 이번 공연은 무척 중요하다고요. 기대하고, 또 준비 단단히 하고 오시라 했어요. 본인도 긴장된다고 하네요(웃음).

조화상 일본과 중국이 빠졌기 때문에 자칫 우리끼리의 연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니까요.

김영미 관객에게는 상상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원래는 한·중·일 합동 무대여야 하는데 지금은 국립국악관현악단만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원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겠죠. 일본과 중국의 악기가 들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어떤 소리가 날까, 궁금증이 생길 수 있겠죠. 더 나아가 저 무대에 세 나라가 함께 오른다면 어떨까 하는 희망도 가져보고요. 다시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만나고 싶은 염원을 품을 수 있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국립극장 「미르」 2017년 5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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