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브제

농담(濃淡)이 품은 선비정신

난초

by 김태희
묵란도.jpg


아래에서부터 위로 가장 길게 한 번, 그 옆에서 조금 더 밑단에 가깝게 한 번,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나도록 또 한 번, 양쪽에 짧은 잎을 몇 개쯤, 중간쯤 꽃대를 세우고, 그 끝에는 몇 개의 작은 꽃잎.


어릴 적 학교에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벼루에 먹을 갈아 붓털의 반쯤 먹을 묻힌 뒤 화선지에 선을 긋고, 정자(正字)를 써 내려갔습니다. 글자를 몇 번 쓰고 난 뒤엔 그림을 그렸는데,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난초’였습니다. 난을 그리는 데 정답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은 중요합니다. 획을 그을 때는 호흡을 잠시 멈춰 ‘무(無)’의 상태를 유지하지요. 추사 김정희는 유배 시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지요.


‘난(蘭)을 치다’라고 하는 이 과정엔 선비들이 사랑했던 식물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안 머리에 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에서 군자의 선비정신을 읽어냈으니 말입니다. 난초의 기품은 우리 춤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냅니다. ‘묵향’ 3장 속 남녀 무용수는 푸른 이파리와 그 사이에 돋아난 청초한 꽃의 조화를 절묘하게 그려냅니다.


글 김태희 | 그림 임희지 ‘묵란도’(국립중앙박물관)


※국립극장 「미르」 2017년 1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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