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과 '잊혀지는 10만명'
#결국 우리는 세상에 속해있다
세상에 대한 관심. 우리는 흔히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만, 세상과 나는 결코 떨어질 수는 없다. 세상 속에 내가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시사에 관한 책을 읽어본다. (오늘 출근길에는 '안도 다다오'에 관한 유현준 교수의 팟캐스트를 듣는데 이렇게 흥미로울 수도 없다.) 다큐와 책 속에는 내가 모르던 이야기들 혹은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실들이 다큐 한 편을 보거나 책 한권을 읽는다고 온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다. 더 깊은 내막을 알아야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망을 알고 기피를 알고 소비를 알 때, 비로소 사회를 이해하게 된다. 사회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사에 대한 독해를 넘어서, 무엇을 누군가에게 팔아야 하고 설득해햐아는 모든 직장인과 자영업자에게 필요한 부분이다.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모르고선 어떻게 잘 팔 수 있겠는가.
#"인간 증발" - 일본에서는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길래, 그들은 스스로를 증발시키는걸까?
그러다 일본의 한 특이 현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도 먼 일본 사회 속을 들여다봤다. 한국과 일본은 문화/역사적으로도 연관이 많고, 특히 경제는 일본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겉으로 봤을 때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인 일본 사람들. 그들의 내막이 궁금했다. 흔히들 일본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본 사회는 어떨까? 알다가도 모르겠는 일본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어떨지 궁금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 단초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어느 나라나 여러가지 이유로 실종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 세상을 분리시킨다고 한다. 바로 '자발적 실종'으로 말이다. 일본에는 매년 자살하는 사람보다 4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 실종으로 사라진다. 한 해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 증발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은 왜 삶을 저버리고 떠나는 걸까.
실종이라는 현상은 어느 나라나 발생하고 보편적이지만, '자발적' 실종은 낯설다. 흔히들 '속세를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종종 푸념하듯 쓰지만, 가족과 친구를 저버린 채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빚, 파산, 이혼, 실직, 시험 낙방 같은 각종 실패에 대한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사라진다고 한다. 일본인들에게 '수치심'은 어떤 의미이여, 그들은 언제 급격히 증발을 택했을까?
# 수치심에 시달리지 못한 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일본 연구서의 대표 저서로 꼽히는 <국화와 칼>에서는 '일본인들은 윗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인들은 실패, 수치심, 매정한 거절을 견디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일본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윗사람들(조상, 부모, 교수, 심지어 일왕)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체면과 관련된 문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까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행동한다. 빚을 지고 있다는 이 독특한 감정은 의무를 요구한다. 그중 첫 번째 의무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의무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조그만 실수에도 일본인들이 크게 자책한다.
결국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국화와 칼> 부분 <인간 증발> 인용
# '잃어버린 10년', 일본은 경제를 잃었고 국민들은 스스로를 부정했다
일본 사람들의 '야반도주'는 특히 버블 경제 붕괴 직후인 '잃어버린 10년' 기간 때 급증했다.
*잃어버린 10년: 1980년대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형성된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졌던 극심한 장기 경제 침체 기간
그들이 증발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잃어버린 10년 기간 동안은 일본 내 급격히 증발이 늘어났고 그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뉴욕에 빌딩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일본, 그들은 한순간에 왜 몰락했을까?
국민들 개개인에게 들이닥친 경제적 비극은 단순히 한 가계의 불합리한 소비 혹은 재정상태가 모든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당시 일본 경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살펴보자. 일본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주식시장이 고평가 되어, 소위 거품 경제 기간 동안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폭등했다.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속 "일본 주식시장, 얼마나 비쌌나?"에서는 당시 일본 주식과 부동산이 얼마나 고평가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1989년 일본의 주가 버블 당시 주가수익률,
즉 주당순이익과 주가의 배율은 무려 67에 이르렀다."
"1980년대 말, 일본에서 주식 가격 폭등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부동산이었다. 주식시장 호황으로 기업들의 증자 및 신규 상장이 쉬워짐에 따라 은행의 기업 대출이 줄어들었고, 은행이 남아도는 돈을 부동산 담보 대출로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비쌌던 일본 주택 가격이 급등했다."
"돈이 돈을 벌어주는 '재테크' 시대가 출현하자, 부동산 시장은 무서운 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1984년을 전후해 100포인트에 불과하던 전국 지가는 1990년 160 포인트로 급등했으며, 특히 동경과 오사카 등 이른바 6대 도시의 지가지수는 무려 300포인트까지 치솟았다"
책에서는 그 당시 일본 경제 상황과 더불어 "왜 일본 부동산 시장은 다른 선진국과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지"와 함께 "자산 가격 버블이 붕괴될 때 불황이 출현한 이유는"처럼 경제적 사건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부동산 거품 그리고 시민들의 부채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일반 시민들은 주택 투기에 나섰다. 그러나 거품이 꺼지자 부동산 버블 당시, 주택을 구매했던 가계의 손실도 막대했다.
더불어, 저자 홍춘욱 박사는 실제로 한 중산층 가구가 주택을 매매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 가계가 입었던 치명적 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거품 경제 기간 동안 부동산을 구매한 가정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자산 15억에 부채 10억을 가진 가계가 있습니다. 이 가계는 10억의 빚을 얻고, 자신의 순자산 5억을 투입해 15억짜리 집을 구매했다고 봅시다.
(*담보인정비율 66%) 그런데 1991년 이후 시작된 부동산 폭락 사태로 집값이 50% 하락하여 7억 5천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가계의 순자산은 마이너스 2억 5천이 돼버립니다."
#특히 한 시대를 뒤흔는 치명적인 경제적 사건의 결과는 서민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야반도주 사무소>를 연출한 감독 하라 타카히토는 얘기합니다.
"버블 붕괴는 비극적이었습니다. 부채의 액수와 상관없이 대출받은 사람들은 자살했죠. 일가족 전체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고 야반도주하여 신원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 나라의 경제 사건은 그 나라와 국민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처럼 한 나라의 특정 현상은 단순히 일시적 발생이 아닌, 경제와 문화의 복합적인 특징 안에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적 현상 속 경제 사건의 그림자
특히 한 시대를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경제적 사건의 결과는 서민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적 현상에는 경제 사건의 그림자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드리운 경우가 많다. 경제적 사건을 모르고선 그 사회의 내막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돈과 연관된 '경제' 그 자체의 영향은 서민들에게 불가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자본으로 인해 새로운 기업이 탄생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듯이. 과거에도 '머니 로드'로 인한 사회적 현상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때로는 일본의 '인간 증발'처럼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경제와 역사는 서점에서는 다른 분류로 진열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긴밀한 연결을 가졌다.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에서는 '영국과 중국이 세계 양대 강국이었던 18세기, 영국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 '메디치 가문부터 암스테르담 은행까지', '미국 남부는 왜 그렇게 노예제도 폐지에 강력하게 저항했을까?'등 많이 들어봤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 속 경제 이야기부터, '왜 상품시장은 20년 주기로 움직일까?', '불황이 시작할 때는 단호하게 행동하라', '버블이 붕괴될 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돈을 풀어야 한다!'까지 대한민국 최고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박사의 날카로운 경제 및 투자 인사이트를 엿볼 수 있다.
50편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으로 한 '머니 로드' 이야기는 꼭 50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이 흥미로웠다. 역사적 사건 간의 연결부터 우리가 지금 놓치지 말아야 할 경제 인사이트까지. 역사, 경제, 사회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저자의 탁월한 편집으로 마치 하나의 장르가 탄생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사에 관심이 있었지만 세 가지를 잡기 힘든 바쁜 직장인과 학생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참고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홍춘욱
<인간 증발>, 레나 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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