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로 돌아간다면...
“시스템에서 일하는 법만 배우지 말고, 시스템이 구동하는 방식을 배워라.”
“시스템의 구성품이 되지 말고, 시스템의 주요 부품이 되거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만의 업무가 아니라, 다양한 펑션 업무를 배워라.”
예전에 입사 전에 읽었던 자기 계발서에서 있던 조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별 신경 안 쓰고 넘겼던 말들이었는데, 대기업을 입사해서 퇴사를 하니까 얼마나 중요한 조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글 중에 대기업에 다니는 장단점에 대해서 살펴봤었죠.
이번 글에서는 대기업에 다닌다는 가정 하에 이것 하나는 꼭 염두했으면 하는 한 가지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대기업은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닙니다. 아무리 개인이 날고 기어도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사내에만 수 백 명에, 사외에는 수천 명이 존재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몇 천, 몇 만 명의 임직원으로 데리고 일하는 조직이 특정 사람에 휘둘린다면, 그 조직은 오랫동안 영속하거나,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없으면 우리 부서는 돌아가지 않아, 내가 없으면 우리 회사는 곤란해져”
미안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낮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할 순 있겠죠. 비용이 약간 올라갈 순 있습니다. 그렇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대기업 중에 특정 사람이 그만둔다고 하여 곤란을 겪을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개인은 극히 드뭅니다.
혹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기업은 철저하게 시스템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움직이지 않더라도 시스템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은 IT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함한 프로세스, 조직 구조 등 체계를 의미합니다.
대기업을 다닌다는 건 안정된 시스템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큰 외부의 위험이나 압력에서 흔들림 없이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내가 당장 빠지더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으니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거겠죠. 그런데, 그건 다른 의미로 살펴보면 시스템 내 개인의 입지가 굉장히 작으므로 교체되거나 퇴출되는 것도 쉽다는 단점을 갖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스스로를 시스템의 구성품임을 인정한다면, 교체하기 어려운 주요 부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기업의 별, 임원이 되는 거겠죠? 구성품임을 피할 수 없다면 기업에서 쉽게 교체하기 어려운 인재로 인정받아서 임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처럼 쉬웠다면 다들 임원이 되겠죠. 사실 웬만한 대기업에서 임원이 된다는 건 하늘에서 별 따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는 회사에서 핵심으로 생각하는 기술이나 노하우를 보유하는 겁니다. 한 분야의 무시할 수 없는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거죠. 원천 기술이나 핵심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면 회사 입장에서도 쉽게 내치진 못하겠죠. 그런데, 그것도 사실 쉽진 않습니다. 최근 제품이 작은 규모도 아니고 거의 시스템들의 집합, 시스템의 시스템 규모라면 그중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시스템을 만든다는 건 기업 내에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혹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임원” 아니야? 아마도 임원이 그런 사람이 될 확률이 높겠지만, 임원이라고 모두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럴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러한 의지가 없거나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면 어려운 일일 겁니다.
기업 내에서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여 안착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업에서 우대하고 중요한 인재로 대우를 하겠죠. 하지만, 꼭 그런 아름다운 미래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공을 가로챔을 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겠죠. 그래도, 그 사람은 기업 외부에서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역량과 만들어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기업 외부에서 자신만의 시스템을 구축하여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를 추구한다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대기업에 입사했다면, 시스템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R&R 내에서 일하는 법만 배우지 말고, 시스템이 구동하는 원리와 방식에 대해서 공부할 것을 추천합니다. 당장 주어진 역할의 일만 하기 바빠서 좁아진 시야에서 일을 하게 되면, 큰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기업 내 업무 표준과 업무 절차들이 있습니다. 기업에서 보내주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내 온라인 교육들도 많습니다. 그것들을 당장의 업무와 관련 없다고 무시해선 안됩니다.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우시기 바랍니다. 대기업의 최대의 장점은 복지가 아니라, 외부에서 누릴 수 없는 교육과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자신이 접속한 사내 포털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바로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자산 들입니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또는 값싸게 접할 수 없는 귀중한 자산 들입니다. 그것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맡은 펑션의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관 부서의 업무, 관련 없는 부서의 업무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큰 시스템의 안정성의 장점은 개개별의 분업화를 통해서 구성품의 역할과 영향을 줄임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만 알아선 외부에서 쓸모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체계를 덜 갖춘 조직으로 이직을 할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넓은 영역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경력을 전환할 수도 있고,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시야를 넓혀서 다양하고 넓은 업무를 파악하고, 단일 업무보다는 업무의 흐름을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도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이전 회사의 업무 표준을 다 읽지 못하고 퇴사한 겁니다. 다양한 자료가 있겠지만, 업무 표준은 기업이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모아서 정돈된 언어로 표현한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읽는 데 따분할 수도 있겠으나, 업무 흐름, 절차, 산출물, 역할 등은 그동안의 시행착오, 노하우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것만 알아도 우리 회사가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돈으로 만들고, 관리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는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옆쪽으로는 눈가리개를 씌워놓죠.
떠나올 때는 몰랐으나, 배울 것이 잔뜩 쌓여있는 지식의 보고를 두고 좁은 시야로 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눈가리개를 벗어버리고 아쉬움 없도록 넓은 시야로 일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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