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양면성과 인간의 길을 묻다

『삼체 0: 구상섬전』을 읽고

by 심야서점

'양자역학의 현실화'가 선사한 매혹적인 혼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SF 대작 '삼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인간 과학의 한계와 어두운 미래'였다면, 그 프리퀄인 『삼체 0: 구상섬전』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자연의 신비를 극복하는 과학의 힘, 그 힘을 다루는 인간의 길은 어디인가?' 이 근원적인 질문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독자의 머릿속에 머물게 합니다.


세계관과 인물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이 두 작품이 확연히 다른 결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 구상섬전, 세 인물이 묻는 과학에 대한 태도


이 소설은 아직 그 원인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자연 현상, 구상섬전(Ball Lightning)을 중심 소재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구상섬전을 둘러싼 세 인물의 태도를 통해, 우리가 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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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린윈은 구상섬전의 희생자가 됩니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의 가치를 잃었을 때 수단에 불과하며, 인간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비극적 결말입니다. 반면, 샤오천과 딩이 박사는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탐구하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합니다. 이 세 인물의 서사는 우리에게 과학을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각인시킵니다.


2. 거시 세계로 넘어온 양자역학의 혼란


우리는 아직 거시 세계만큼이나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 원리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양자 역학을 정확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미시 세계에서는 우리의 상식 외의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시 세계에 대한 이론들이 거시 세계에 구현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묘사한 지점입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굉양자'와 '굉전자'의 모습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묘사되는 양자 세상의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솔직히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양자 역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미시 세계의 불확정성이 거시 세계로 넘어왔을 때의 혼란과 경이로움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관측자로 인해 확정된 상태로 전환된다고 단순하게 묘사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약간의 혼란을 주었습니다. (관측자가 광자를 통해 영향을 줌으로써 위치와 속도가 변한다고 이해했던 기존 지식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테일한 과학적 논쟁과는 별개로, 소설 전체의 몰입도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자극을 주기도 했습니다.


3. 우리가 선택해야 할 '해야 할 일'


과학적인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이 소설은 어려운 과학서가 아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결국 『구상섬전』은 과학 지식의 습득보다는, 그 지식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그 결과가 가져올 도덕적 책임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 책은 과학 발전의 최전선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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