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에는 다양한 업종에서 일을 해봤다. 10여 번이 넘는 아르바이트부터 세탁기생산, 보험영업, 윤활유납품, 식품배달, 가구시공, 과일판매, 공사장 막노동까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보려했다. 가리지 않고 아무 일이나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첫 직장은 세탁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가공, 조립, 검사하는 LG하청업체인 P라는 회사였다. 생산파트에 배정된 나는 세탁기 디스플레이의 불량유무를 검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잘 들어왔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것이 큰 오산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일이 많은 성수기가 되면서부터였다. 물량이 많아지면서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종일 일을 해도 물량을 다 쳐내지 못할 때는 조기출근을 해서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했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중식잔업이라고 해서 1시간 되는 점심시간을 반으로 쪼개 30분간 일을 더 해야 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만 15~17시간이나 되었다.
힘든 와중에 더 암울했던 건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는 점이다. 토, 일요일, 공휴일 할 것 없이 계속 출근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쉬면 다행이었다. 최장 2달에 하루밖에 못 쉰 적도 있었다. 그나마 주말에라도 정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인력이 모자란 상황이라 연차는 꿈도 못 꿨다. 일이 너무 많다보니 하나둘씩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처음엔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인원충원이 됐지만 나중에는 살인적으로 일이 많은 회사라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더 이상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버텨야만 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직장인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그 회사가 유독 힘들었던 건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조립된 결합체가 내려오면 부품별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불량은 없는지 검사하는 일을 컨베이어 벨트 앞에 가만히 서서 15시간 넘게 계속 반복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전에는 화장실을 갈 수도 없었고 커피 한 잔 마실 수도 없었다. 업무 중 휴대폰 사용도 금지되었다. 기계가 멈추지 않는 이상 쉬지 않고 기계처럼 일해야 했다. 컨베이어 벨트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20대의 나라도 매일 같이 그렇게 일하며 견디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을 하며 꾸벅꾸벅 조는 건 일상이었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든 적도 있었다. 잠깐 조는 그 사이에 꿈을 꾸기도 했다. 한번은 퇴근 후에 집에 도착해 잠깐만 쉬다가 씻으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벽에 기대어 밤새 앉은 채로 잠이 든 적도 있었다. 죽을 만큼 힘이 들었고 아침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출근을 못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면서 하루는 구토와 두통 증세가 나타나 출근길에 통근차에서 내려서는 풀이 가득한 허허벌판에 드러누웠다가 한 시간 넘게 잠든 적도 있었다.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밑바닥까지 쓸 수 있다는 걸 그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처음 느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말을 바라보며 견디는 다른 직장인들과 달리 우리 회사는 쉬는 날이 없었기에 바라볼 수 있는 주말도 없었다. 하루가 10년 같았다. 정말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런 회사에서 3년 6개월을 버텼다.
힘들었던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금도 숨이 턱턱 막힌다. ‘왜 그렇게 힘든 회사에서 그렇게 고생했을까’, ‘왜 일만 하며 그 젊은 시절의 4년을 그렇게 헛되이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후회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행복을 전하는 어느 강연자의 강연에서 시작은 어려울수록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때의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내가 첫 직장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직장을 구할 때는 일은 많이 하고 돈은 적게 주는 곳으로 구하는 게 좋아요. 돈을 많이 주는 회사는 그만큼 요구를 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고 스트레스가 많아요. 만약 그만두게 되면 전보다는 더 좋은 회사를 가려고 하기 때문에 첫 직장이 좋을수록 고를 수 있는 데가 많지 않습니다. 대신 일은 많이 하고 돈은 적게 주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면 기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일을 그만두지 않을까 하고 사장이 내 눈치를 봐요. 돈도 알아서 올려줘요. 설령 일을 그만둔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어딜 가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직장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나은 회사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은 평생 실직할 일이 없어요.”
내가 일했던 첫 직장이 딱 그랬다. 소문이 날 정도로 일은 많았고 시급제라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남아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했고 특히 내가 하는 일은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언제나 기를 펴고 일할 수 있었다. 일을 그만둔 이후에 다른 일을 구하기도 수월했다. 첫 직장이 워낙 힘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나은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첫 직장에 비하면 별 것 아니어서 딱히 가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트럭을 몰고 공장에 윤활유를 납품하는 일도 해보고 마트에 달걀을 배달하는 일도 했다. 땀 뻘뻘 흘려가며 가구 시공하는 일도 해봤고 과일가게에서 일할 때는 친구들이 무슨 그런 일을 하냐며 놀려도 창피한 줄 모르고 열심히 과일과 채소를 팔았다.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승합차를 타고 다니며 공사장 막노동을 몇 달씩 해보기도 했다.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나에게 청년실업률이 해마다 치솟고 있다는 뉴스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이 모든 게 다 시작이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구할 때 좋은 직장, 이를 테면 복지와 업무환경이 좋고 돈은 많이 주는 회사를 원한다. 능력이 돼서 그런 직장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면 아닌 대로 괜찮다. 일은 많고 돈은 적게 주는 회사가 당장은 힘들겠지만 처음 시작이 힘들면 힘들수록 나중이 좋을 수 있다. 어디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힘과 내공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나에게 좋은 일인 것이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보며 살아온 사람은 사소한 장애물에도 쉽게 넘어지고 만다. 반대로 고생을 많이 해본 사람은 웬만큼의 고난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이겨내곤 한다. 때문에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첫발을 어디에 내딛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고생이라면, 이를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을 견뎌내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