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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Apr 23. 2020

내 마음대로 확신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나를 의심한다

“너 되게 보수적이야.”

내가 보수적이냐는 나의 질문에 지인이 내게 한 대답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내가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비교해보고 책, 뉴스, 인터넷 등에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니 가끔은 내가 좀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나는 틀림없는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나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했다. 틀에 박힌 생각인 것 같아도 내가 그럴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스스로에 대한 그런 믿음이 "너 되게 보수적이야."라는 지인의 한 마디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렸던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의미를 결코 옳고 그름으로 양분할 순 없지만 단어의 본질을 따지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보를 진취적이고 깨어있는 좋은 것으로, 보수를 낡고 고리타분한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보수적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도전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보수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먼 단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인은 내가 평소에 어떤 보수적인 발언을 했는지 하나씩 열거하며 말해주었고 듣고 보니 나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매사에 확신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쉽게 확신하는 습관이 있다. 잘 모르는 것도 안다며 단정짓는 버릇이 있다. 운전을 할 때가 특히 그렇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모르면 미리 내비게이션을 검색해본다. 초행길이면 목적지까지 내비를 보면서 가지만 한두 번이라도 다녀본 길은 지도에서 길을 대강파악하고 내비를 끈 채 운전한다. 분명 잘 찾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며 길을 나서지만 생각처럼 잘 찾지 못하고 헤맬 때가 많다. 확실히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렇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못 찾으면 그제서야 다시 내비게이션으로 검색을 한다. 처음부터 내비를 보면서 운전할걸 하는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잘 안다고 자부했다가 시간만 더 버린 셈이었다.


어렴풋이나마 아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모르면서 안다고 확신하고 우기는 경우도 꽤나 많았다. 예전엔 사람들이 왜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커피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단지 플레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언젠가부터는 커피의 고소한 맛을 알게 되었고 피곤할 때 커피를 마심으로써 정신이 개운해지는 것도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게 됐다.


또 예전엔 핫팩을 보며 잠깐 따뜻한 걸 왜 쓰냐며 사용해보지도 않고 무시했지만 실제로 써보니 엄청 따뜻했고 발열시간도 되게 길었다. 지금은 겨울만 되면 집에 쟁여놓고 쓰는 아이템이 되었다. 트레킹화를 사러 갔을 때 고어텍스 기술에 대해 얘기하는 매장주인을 보며 비싸게 팔려고 고어텍스라는 쓸데없는 이름을 붙인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신어보니 방수기능이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다. 지금은 트레킹화를 살 때 고어텍스가 아니면 안 산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밤운전이 잘 안 보여서 위험하다고 말하는 걸 보고 내가, 라이트 켜면 다 보이는데 뭐가 안 보이냐며 내 마음대로 말했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 운전을 해보니 라이트를 켜도 확실히 밤이 낮보다는 시야확보가 안 돼서 위험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지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았고 하루가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왜 답신을 안 주냐며 타박을 했더니 지인이 말했다.

"전화 안 왔는데?"


황당하다는 듯 내가 되받아쳤다.

"아니 무슨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전화가 안 걸렸다는 게 말이 되냐? 거짓말 좀 하지 마라."


지인은 억울했는지 전화기록을 캡처해서 보내주며 정말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는 걸 강력하게 어필했고 확인해보니 정말로 전화가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내 생각대로 확신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내가 아는 것이 맞다고 자주 우겼고 모르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며 내 멋대로 판단하곤 했다. 마치 내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100%라고 장담을 많이 한 건 사람과의 관계에서였다. 저 사람은 분명 나랑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고 정말 별로라고 확신했던 사람이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 많았다. 타인을 보면서도 저 두 사람은 오래 사귀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오랜 연애 끝에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커플도 있다. 그렇게 점쟁이마냥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는 듯이 말하곤 했지만 아무리 촉이 좋은 나라도 사람의 마음을 세세하게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건 지나친 오만이었다.




요즘은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보지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 권의 책을 통해서였다. 바로 강세형 저자의 나를, 의심한다라는 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한다. 소설책을 보면서도 진짜가 아닐까 의심하고, 에세이 책을 보면서도 거짓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리고 그건 너무 당연한 일, 또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멈추는 순간, 나는 그런 어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믿고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100%의 진실, 100%의 옳음이라고 확신하는 어른,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어른이.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를, 의심한다.

                            《나를, 의심한다》 중에서


살다보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다. 200페이지가 넘는 많은 내용보다도 한두 장밖에 안 되는 머리말에서 느낀 울림이 더 컸다. 내 안에 있는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쉽게 확신하며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됐다.


그 이후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게 됐다. 세상에는 100% 맞는 것이 없다는 것을, 설령 100% 맞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됐다. 그렇게 나를 의심하기로 했다. 강세형 작가의 말처럼 100%의 진실, 100%의 옳음이라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 안에 있는 바다가 나도 모르는 새 꽁꽁 얼어붙고 있는 건 아닌지 관찰하며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를 들고 매일 나를 의심하고 또 반성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조건 맞다고 확신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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