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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Aug 25. 2020

화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서

얼마 전 은행에서 직원과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콜센터 직원과도 통화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언제 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는 대노(大怒)했다.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한 게 아니다. 은행에서 큰소리치고 싸웠다고 말하면 나를 몰상식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나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은행 직원과 콜센터 직원간의 소통 오류 그리고 필요한 서류를 잘못 안내해준 것 때문에 내가 시간적, 정신적으로 크게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풀어쓰자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가자니 나의 인성을 의심받을 것 같아 짧게 간추려 써본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아주 큰일이다. 일 관련해서 내가 아버지 대리로 은행 업무를 볼 게 있었는데 문제의 발단은 서류였다. 은행 방문에 앞서 콜센터 직원에게 먼저 관련서류를 안내 받았는데 직원이 서류 안내를 잘못 해주는 바람에 그날 일처리를 하지 못했다. 며칠 뒤 필요한 서류를 다시 확인한 후 은행에 방문했는데 이번엔 은행직원이 서류가 안 맞다고 했다. 일단 은행을 나온 후 콜센터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확인해보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몇 분 뒤 콜센터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 서류만으로 일처리를 해줄 테니 은행에 다시 방문해달라고 했다. 이후 은행직원도 콜센터 직원과 통화를 했는지 지금 은행에 오면 업무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다른 볼일 때문에 가지 못하고 며칠 뒤에 다시 방문했다. 전에 있었던 그 직원이 없고 다른 직원이 있었다. 혹시나 하고 서류를 줬더니 역시나 그 직원도 이 서류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다. 이때부터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준비한 서류인데 애초에 서류안내도 잘못됐고 또 직원들끼리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아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가 다 짊어져야 했다. 더군다나 나는 은행 볼일 때문에 일부러 직장에 연차를 썼던 참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주 동안에 3번의 연차를 썼던 것인데 그렇게 했는데도 일처리를 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콜센터는 우리와 상관없다는 은행 직원의 황당한 말 때문에 더 열이 받았다. 아주 그냥 제대로 빡이 친 거다.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고 그렇게 해서 은행에서 언성을 높이며 직원과 싸웠던 것이다. 결국 일처리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이번 업무와 관련해서 잘못 안내해준 콜센터 직원과 통화해서 나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날 얼마나 화를 냈던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좀처럼 화가 가시지 않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기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중고나라에서 프린터 토너를 구매했는데 내가 구매 당시 봤던 제품과 다른 모델의 제품이 배송되었다. 판매자에게 문의를 했다. 판매자가 이미 게시글을 지운 상태라 판매자가 잘못 올린 건지, 내가 잘못 본 건지 시비를 가릴 수가 없었지만 정황상 내가 잘못 본 걸로 결론을 내렸다. 프린터와 호환이 안 돼 판매자에게 환불을 요구했다. 판매자는 환불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어차피 내 잘못이니 환불을 안 해줄 수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판매자가 판매할 당시 제품 박스가 조금 뜯어졌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택배를 받고 보니 제품박스가 뜯어진 건 둘째치고 내용물을 포장한 그 비닐이 뜯겨져 있었다. 비스킷을 예로 들자면 과자 상자가 뜯겨있고 거기에다 과자가 들어있는 비닐까지 뜯긴 그런 상태인 것이다. 한 마디로 새상품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토너를 보니 검은 가루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뭔가 사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판매자는 오히려 환불받으려고 일부러 뜯은 거 아니냐며 나에게 덮어씌웠다. 어이가 없었다. 비닐이 뜯긴 걸 누가봐도 모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처음에 판매자가 보내준 사진을 바탕으로 애초에 뜯긴 제품이었다는 걸 증거로 제시했는데도 판매자는 수긍하지 않고 계속 딴소리를 했다. 이런 메시지 보낼 시간에 중고나라에 올려서 되팔아라는 조롱 섞인 말도 했다.


만약에 판매자가 '제품비닐이 뜯긴 걸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환불은 해줄 수가 없다' 뭐 이런 식으로만 말을 했어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어쨌든 제품모델을 잘못 본 내 잘못도 있으니까. 하지만 물건을 속여서 판 것도 모자라 제품포장을 뜯은 것을 나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이 받아 한바탕 할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서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고 호흡도 가빠졌다. 주소도 나와 있는데 찾아간다고 협박을 할까 아니면 환불해줄 때까지 전화하고 문자해서 못 살게 굴어볼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문득 그 전에 은행직원과 큰소리도 싸우며 화를 내다가 몸져누운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렇게 화를 내다가 결국 내 몸과 마음만 상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또 전화하고 싸우고 해봤자 나만 힘들 게 뻔한데, 그냥 그만하자. 그거 돈 몇 푼 된다고, 차라리 남 도와줬다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내가 마음이 편하지. 한 번 더 확인을 잘하자는 교훈 얻은 셈치고 그냥 여기서 그만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마음이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도 가라앉았다. 놓아버리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웃고 있었다. 그 순간 확실히 느꼈다.


'화를 냈다면 또 다시 나를 괴롭혔을 텐데 그냥 놓아버리니 이렇게 편하구나. 화를 내지 않는 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인 거구나.'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듯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앎에도 차이가 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 나는 이번 은행 사건과 중고나라 사건을 통해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제대로 느끼고 배웠던 것이다.


모든 일을 그러려니 하며 물 흐르는 듯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큰 돈이 걸린 문제라면 언성을 높여서라도 받아내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큰소리쳐서라도 나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싸워서라도 쟁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화를 내서라도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럴 정도의 큰일이 아닌 웬만한 사소한 일은 화내지 말자는 뜻이다. 화를 참으라는 것이 아니다. 놓아버리자는 말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다.




용서는 남을 위한 일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도 이제 좀 알 것 같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내 안에 분노와 증오가 싹튼다. 마음 속 독기는 결국 나를 병들게 만든다.

화도 그런 것 같다. 화를 내면 화가 풀리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쌓인다. 그 화는 내 안에 있는 악마를 키운다. 그 악마가 결국 나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이제는 화내지 않기로 했다. 큰소리로 화를 내서 몸과 마음이 아플 바에 차라리 조금 손해보기로 했다.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니까.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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