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5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알람을 맞춰놓은 5시 30분보다 30분이나 더 이른 시간에 눈이 떠진 거다. 12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루를 평소보다 더 여유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승진신고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매일 파카, 점퍼와 같은 똑같은 평상복만 입다가 오랜만에 매무새를 다듬고 출근할 생각에 설레어 일찍 깨인 게 분명했다.
이부자리를 대강 정리하고 부엌으로 나와 불을 켰다. 동공 안으로 침투하는 불빛때문에 눈이 찡그려졌다. 실눈을 뜬 채로 서서히 불빛에 적응해가며 페트병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웃풍이 도는 스사한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옷방으로 들어왔다. 어젯밤 속옷부터 겉옷까지 미리 점 찍어놓은 옷을 하나씩 껴입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파스텔톤의 꽃무늬가 들어간, 내가 가장 아끼는 속옷을 입었다. 여자친구랑 1박 2일 여행갈 것도 아니고 누가 봐줄 것도 아닌데 참 별 걸 다 신경쓴다 싶었다. 강추위라 해서 여러 타이즈 중 가장 두꺼운 걸로 입었다.
짜임이 두꺼운 갈색 목폴라를 입고 흰색과 검은색의 체크무늬가 있는 코트를 입었다. 옷을 안 산 지 1년도 더 넘어 신상이라 할 만한 옷은 없었지만 괜찮았다. 요즘 매일 트레이닝복만 입다보니 코트를 걸치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드라이해서 모양을 만든 후 왁스를 바르고 스프레이로 마무리했다. 3:7 포마드 헤어스타일 완성. 신발은 굽이 높은 검은색 앵글부츠를 선택했다. 오랫동안 신지 않아 신발 위로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지만 몇 번 슥슥 닦고 보니 새신발과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손목에 향수를 한번 칙칙 뿌린 후 목과 겨드랑이를 톡톡 두들겼다. 노란색 땟국물이 가득 묻은 하얀색 마스크도 새 것으로 바꿨다. 산뜻하다. 하루만 더 껴야지 하고 쓰던 마스크, 버릴 때마다 왠지 모를 개운함을 느낀다.
집을 나서려다가 문득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2020년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사진이라고나 할까. 거울을 보며 한 장 찍었다.
오랜만에 찍어서 그런지 영 어색하다. 그래도 기념이다. 흑백으로 하니 왠지 느낌이 있다. 대충 찍은 것 치곤 마음에 든다.
밖은 생각만큼이나 추웠다. 출근길에 뭔가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경 그리고 눈썹 그리는 걸 깜빡했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좀 멀리 와있었다. 안경이야 뭐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김이 서려 불편할 거 같았다. 눈이 안 좋은 게 아닌 분위기 전환용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니 없어도 무방했다. 눈썹은 좀 없긴 하지만 예전에 문신한 자국이 아직 조금 남아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대로 직진했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매 순간을 느끼며 보내자고. 사무실에 있는 내 책상과 사무용품들, 직장동료, 사람들과의 대화, 길거리의 풍경, 차디찬 바깥공기, 따뜻한 커피 한 잔, 째깍째깍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바늘까지 다.
오전 10시에 승진신고가 있었다. 승진자는 나 포함 18명이었다. 평소보다 승진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만큼 축하해주러 온 동료 및 선후배들도 많았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었으면 아마 빈 공간 없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을 것이다. 한 사람씩 또 다같이 꽃을 받고 사진도 찍었다. 나는 들떠있었다. 승진보다도 사람들이 모여 얼굴보고 인사하는 북적북적한 그 분위기가 좋았다. 승진신고는 금세 끝났다.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순간 공허해졌다.
점심시간 식사 후 가지고 온 케이크를 꺼냈다. 내년부터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선배를 축하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케이크였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연말이니 케이크 정도는 잘라야 한다는 생각에.
케이크는 주문제작한 케이크였다. 선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모티콘을 올렸다. 선배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케이크 위에 글자로 새겼다. 선배가 케이크를 보더니 흠칫했다. 감동을 받은 듯했다. 괜스레 내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서둘러 초를 꽂은 후 불을 붙이고는 후~ 하고 불을 껐다. 형식적인 의식을 마친 후 다같이 맛있게 케이크를 먹었다. 케이크를 자르고 나니 왠지 이번 2020년에 붙어있는 미련과 아쉬움의 끈을 잘라낸 듯했다.
퇴근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탔다. 시동을 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인데도 오늘만큼은 마음이 허전했다. 연말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연말을 수십 번을 보냈으면서도 이 기분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자동차 엔진은 어서 빨리 출발하라는 듯 부릉부릉 울리고 있었지만 나는 애꿎은 휴대폰만 쳐다보며 있었다. 출발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도 울적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다. '연말이라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그런 거야. 오늘이라고 뭐 특별할 거 없어. 똑같은 하루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를 켰다. 맨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책을 읽었다. 폰도 봤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좀 나았다. 나른했던 몸도, 허전했던 마음도.
아침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특별하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별 게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다. 평소처럼 먹고 숨 쉬고 걷고 웃고 말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현재 시각 19시. 벌써 하늘이 어둑해졌다. 올해도 몇 시간 안 남았다. 올해는 재야의 종소리를 안 보고 안 들을 생각이다. 새해 첫 해는 더더욱 안 볼 거다. 괜히 의미를 담아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여느 때처럼 똑같이 자고 일어날 거다. 곧 잠이 들고 나면 새해가 오겠지. 그렇게 나는 또 한 살을 먹겠지.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벌써부터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안부문자가 온다. 새해 복? 물론 좋다. 복도 복이지만 2021년은 무탈한 한 해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일이 가득한 게 행복이 아니라 우환과 큰 걱정이 없는 게 행복이니까. 올 한 해 고생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박수를. 안 어울리게 꽤나 감성적이다. 어찌보면 느끼하기도 하다. 연말이라 그런가보다.
모두들 남은 하루 마무리 잘 하시고 2021년 새해 잘 맞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