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그린 나의 포스터를 보며 선생님이 했던 의외의 말

by 기타치는 권작가

1997년,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때의 일입니다. 그날은 담임선생님의 숙제검사가 있었습니다. 숙제는 포스터 그리기였습니다. 포스터 주제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어떤 도덕적 언행을 독려하는 그림과 글귀를 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숙제 검사를 하는데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숙제를 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탁 위에는 포스터가 몇 장 올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화가 잔뜩 났고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을 보며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숙제를 해왔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있었지만 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 숙제를 안 해오냐며 언성을 높이던 선생님은 훈계를 하다 말고 갑자기 교탁 위에 놓여있는 포스터 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들었습니다. 그러곤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그 그림이 누구의 그림인지 궁금해하며 포스터를 쳐다 본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제가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책상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되게 못 그렸거든요. 스케치도 삐뚤빼뚤하고 색칠도 덕지덕지 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결코 잘 그렸다고 칭찬하기 위해 반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누가봐도 형편없는 포스터를 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건지, 그런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펼친 포스터를 빨리 거둬주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던 그때 선생님이 포스터가 공중에 펄럭거릴 정도로 크게 흔들며 이내 입을 열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쓰시던 선생님은 화가 났음에도 평소처럼 존댓말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되게 의외였습니다.


"이것 보세요. 태현이가 그림은 못 그려도 그래도 숙제는 해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숙제를 안 해오는 애보다는 백 배 나아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 저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저 형편 없는 그림의 주인 이름을 밝혀서 어쩌자는 거지? 거기에다 못 그렸다는 말은 또 뭐람? 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어떤 심정에서 하는 말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죠. 눈 앞에 쥐구멍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내 몸을 우겨넣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창피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다른 아이들이 내 그림을 보고 속으로 비웃진 않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성실함을 칭찬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선생님에 대한 야속함 마음뿐이었습니다. 여러 포스터 중에서 하필 내가 그린 포스터를 아이들에게 보여준 게 많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창피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했던, 2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우고 싶은 기억은 아닙니다. 그날의 에피소드를 통해 나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할 때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그냥 해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 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성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실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해보는 그런 태도가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 저에게 잘 대해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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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에 책쓰기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H가 있었습니다. H도 저도 꾸준히 글을 썼고 각각 자신의 저서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꽂혀 있는 여러 책 중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낯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H였습니다. 그 책은 저와 함께 수업을 듣고 난 직후에 출간한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미 서너 권의 책을 더 출간한 상태였습니다. 의아했습니다. H의 책을 보면 문장력이나 내용이 그리 특출나 보이진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나 많은 책을 출간한 것이 신기하고 또 대단해보였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고민해 봤습니다. 일단 한번 써보자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비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H라고 왜 더 좋은 글, 더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쓰면 쓸수록 더 잘 쓰고 싶은 게 작가의 마음인데 H 역시 그랬을 겁니다. 글이 잘 써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는 날이 H에게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H는 꾸준히 글을 썼고 그 결과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다작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째 책 쓰기를 시작조차 하고 있지 않는 저와는 달리 H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꾸준히 써온 겁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며 신분을 구분하곤 하는 시대에 삽니다. 흙수저인 사람들은 노력해봤자 금수저를 따라 잡을 수 없다며 한탄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금수저보다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순 있겠죠. 그럼에도 저는 일단 뭐든 시도는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라도 해야 중간은 간다고 평소 생각하거든요. 꼭 1등이 되기 위해 뭔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잘한다고 칭찬은 듣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못한다고 욕은 먹지 말아야 하잖아요. 형편없는 그림 실력이지만 그래도 숙제를 해감으로써 꾸지람만은 면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저처럼 말이죠.


잘하면 좋겠지만 잘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꺾이더라도 다시 일어나 꾸준히 달려가는 열정과 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작가 H처럼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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