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동, OOO아파트 가주세요."
택시를 탔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동안 했던 고민이 또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민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었다. 지인들에게 자문을 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애초에 답 따윈 없었다. 선택과 책임의 문제였으니까.
갑자기 기사님이 내게 □□동으로 가면 되는지 한번 더 물어본다. 아까 내 말을 잘못 들었나 보다. OO동이요 하고 다시 얘기했다. 기사님은 □□동으로 잘못 들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뭐라뭐라 얘기를 하는데 같이 웃음이 빵 터졌다. 몇 마디 안 했는데 유쾌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까 했던 고민을 이어서 했다. 택시 기사님에게 이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평소 낯가림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막 말을 걸진 않는다. 택시 타서 기사님에게 먼저 말 걸어본 적도 없다. 이 기사님에게는 말을 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까 서로 얘기하며 웃을 때 뭔가 느낌이 좋았다. 입을 열었다.
"기사님, 제가 기사님한테 할 얘기는 아닌데요. 고민이 돼서 그냥 여쭤보는 건데요."
이성 문제였다. 호감가는 동갑내기 여자가 있었다. 잘해볼 수도 있었는데 잘 안 됐다. 당시엔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조금 후회가 됐다. 돌이킬 수 없기에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지만 궁금했다. 나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기사님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다음번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더 잘 대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기사님이 말했다.
"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해봤어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갑자기 자신의 소싯적 연애담을 들려줬다. 꽤나 흥미로웠다. 와 진짜요? 하고 추임새가 절로 나왔다.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얼굴을 보니 좀 생겼다. 나이는 60세 정도로 돼보였고 흰머리를 뒤로 다 넘긴, 소위 올백머리를 하고 있었다. 왕년에 여자 깨나 울렸을 것 같은 훈훈한 느낌이었다. 기사님의 멋있는 용모가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경험담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했다. 왕년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들려준 기사님은 "다음 번에는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밀어붙여 보세요."라며 나를 응원해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택시비로 15,000원이 나왔다. 휴대폰으로 결제하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진 상태였다. 집에 지갑을 두고 온 터라 현금도 없었다. 기사님에게 집에 가서 금방 현금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한 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뛰어갔다. 최근 택시 요금 먹튀사건이 빈번하다는 뉴스가 많아 기사님이 혹시라도 걱정할까 싶어 서둘러 현금을 가지고 뛰쳐나왔다.
택시 보조석 앞에 섰다. 창문이 열렸다. 나보고 "엄청 빨리 갔다 오셨네요." 하며 웃는다. "여기 있어요." 하고 돈을 건넸다. 만 원짜리 지폐 2장이었다. 잔돈을 거슬러 주려던 기사님에게 내가 말했다.
"잔돈은 안 주셔도 돼요. 얘기 들어주신 값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고맙습니다."
기사님은 살짝 당황한 듯 하더니 이내 나에게 고맙다며 연거푸 인사를 했다. 나도 같이 웃으며 인사했다. 택시가 떠나고 나도 집으로 올라왔다. 터놓고 나눈 얘기를 회상하니 웃음이 났다.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이 마음에 더 와 닿을 때가 있다. 기사님의 말이 내겐 그랬다. 팁으로 준 5,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내 얘기 잘 들어주는 기사님을 만난, 운이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