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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Sep 08. 2019

타로카드 집에서 공감을 배운다

  살다보면 힘이 들 때가 있다. 화도 나고 이유 없이 우울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타인에게 털어놓곤 한다. 하소연 하면서 속 시원히 털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그만큼 크다. 상대방이 내 감정에 공감해줌으로써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공감은 함께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의 시작은 듣기이다.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경청해야 한다.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들어주고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묵은 감정은 해소될 수 있다. 나 역시도 타인의 경청과 공감을 통해 나쁜 감정을 해소할 때가 있다. 바로 타로카드 집에서 상담받을 때이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타로카드를 보러 간다. 항상 가는 단골 타로카드 집이 있다. 그 곳을 이용한 지가 한 8년은 넘은 것 같다. 주로 보는 건 연애운이다. 호감 가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떤지 궁금하면 찾아가곤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빨리 체념하고 싶을 때도 갔다. 


사실 타로나 점, 사주 같이 미신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믿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타로카드를 보러가는 이유는 내가 가는 타로카드 집은 조금 특별해서이다. 웬만한 사람들보다도 내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점때문이다. 주위에 있는 지인들보다도, 내가 만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보다도, 심리상담학을 전공한 심리상담교사였던 전 여자 친구보다도 진심을 다해 내 얘기에 귀 기울여준다. 나의 일을 마치 자기 일인것마냥 공감해준다. 같이 손뼉치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나보다 더 열이 받아 씩씩거리기도 한다. 타로카드를 보러 한 번 갔다오면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릴 정도이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잘 들어주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노력해서라기보다는 사람 자체가 원래부터 경청과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잘 맞힌다는 소문만 듣고 찾아간 타로카드 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맞히고 못 맞히고를 둘째치고 그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점때문에 늘 찾는 곳이 되었다. 지금은 30분이라는 상담시간을 정해놨지만 시간 제한이 따로 없었던 때는 1시간 동안이나 나의 고민에 대해 함께 얘기 나누곤 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게 화장실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타로카드 집이 딱 그랬다.


  내가 가는 단골 타로카드 집이 남다른 곳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다른 새로운 타로카드 집에서 상담을 받고 난 이후부터였다. 내가 가는 타로카드 집처럼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언젠가 한 번은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와 이별한 후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 답답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 한 타로카드 집에 들어갔다. 서면 골목에 있는 여러 타로카드 집 중 하나였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후기가 많았다. 유명한 타로카드 집인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카드를 펼치더니 골라보라고 했다. 내가 선택한 카드를 보던 사장님은 현재의 상황과 그리고 내가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내 얘기를 좀 더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사장님은 예언가마냥 미래를 예측하기 바빴다. 내 얘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할 말을 더 많이 했다. 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잘 된 일인지, 앞으로 다시 만날 가능성은 있는 건지 등을 맞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원한 건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도록 내 심정에 공감을 좀 해달라는 거였다. 너무 힘들고 답답하니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좀 해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사장님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형식적인 얘기만 하더니 10분이 지나자 5,000원을 달라고 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다른 곳도 다 이런 가 싶어서 나오자마자 옆에 있는 다른 타로카드 집에 들어갔다. 앞에 갔던 집보다는 그나마 다정다감한 느낌이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내 눈에는 그저 자신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맞히는지 뽐내려는 노력밖에 안 보였다. 물론 1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얘기를 해야하다보니 서둘러 얘기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타로카드는 얘기를 들어주는 곳이 아닌 뽑은 카드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주목적이기에 그들이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자주 가던 타로카드 집과 자꾸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열을 올리며 말하던 단골 타로카드 집의 사장님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단골 타로카드 집에 가서 상담을 받을 때마다 느낀다. 역시 공감만큼 큰 위로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 없이 그저 나의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얼마나 경청하고 있을까? 얼마 만큼 공감하고 있을까? 들어주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나의 기준으로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터넷이나 SNS와 같이 나를 표현하고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많아졌지만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서로 자기의 말만 계속 하다보니 경청과 공감은 더욱 멀어졌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얼마나 경청하고 공감하고 있는지 한 번씩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말했다.


"공감은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완전하게 공감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공감하려 해도 상대방의 마음과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는 말일 게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공감도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부모님을 먼저 떠나 보낸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지만 친구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다. 그때 나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돌아가셨을 상황을 상상해보고 슬픈 감정을 느낀다면 그때 진정으로 친구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공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감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남들까지 신경쓰고 사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지 공감이 존재할 때 타인과의 관계도 우리 사회도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나와 함께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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