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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Sep 17. 2019

술을 못 마시니 손해 볼 일이 많습니다

얼마 전 회식이 있었다. 직장상사 중 누군가가 나에게 술을 따라주려 했다. 내가 말했다.


"저 오늘 차 가지고 와서 술 못 마십니다."


"대리하면 되지, 대리."


"다른 사람이 제 차 운전하는 거 싫어해서 대리 안 합니다."


"우리 때는 저렇게 못했는데 요즘 애들은 다르네."


거절을 잘한다. 주관이 뚜렷하다고 해야 할지 자기 주장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거절하는 편이다. 너무 단칼에 거절했나 싶기도 하지만 술을 거절한 건 마시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술을 못 마신다. 그래서 일부러 차를 가지고 간 것이다. 


가볍게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신다. 하지만 소주는 안 마신다. 20대까지만 해도 술을 어느 정도는 마시는 편이었다. 1병에서 1병 반 정도 마셨으니 그리 못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술을 끊게 된 건 몸이 나빠지면서부터였다. 작년 쯤 과식하다가 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음식을 조금만 잘못 먹어도 속이 심하게 쓰린다. 한 번 쓰리기 시작한 속은 일 년이 넘도록 나를 괴롭혔고 약을 먹어도 듣질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위장이 약해 건강관리를 잘해왔는데 이런 속쓰림은 처음이었다. 과식하거나 밤 늦게 먹는 식습관을 고쳐야 했다. 술도 끊어야 했다. 술을 멀리하면서부터 술자리가 부담스러웠 건강을 위해서 술을 거절해야 했다. 원체 거절을 잘하는 성격이라 술을 거절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술 거절의 기술

그냥 안 마시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변명이 필요했다. 처음엔 술을 못 마신다거나 아니면 몸이 안 좋아서 술을 못 마신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이런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술도 자꾸 먹으면 느는 거야!"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부터 몸이 그렇냐?"


를 몰고 와서 술을 못 마신다고 하면 대리운전 부르면 되지 뭐냐 문제냐며 큰 소리친다. 변명의 강도를 좀 더 높여야겠다 싶었다. 거짓말을 보태기로 했다.


"술이 안 받아서 술만 마시면 토해요."

"아토피가 있어서 술만 마시면 온몸이 간지러워서 잠을 못자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남자가 술도 한 잔 못하냐며 무시섞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좀더 극단적으로 얘기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바로 이렇게.


"저 예전에 위암 걸린 적 있어가지고 술 한 잔도 마시면 안 돼요. 재발할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위암이라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채 술병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싶다만 말이 씨가 될까 싶어 이 말만은 삼가는 중이다.  


술을 거절하긴 하지만 분위기는 맞추려고 노력한다.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고 건배를 할 때면 물이 담긴 소줏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며 사람들과 잔을 부딪힌다. 술자리에서 술을 안 마셔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분위기만 맞춰가며 놀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술을 못 마시면 손해볼 일이 많다

우선 술을 안 마시니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야 재미도 있는데 나만 술을 안 마시고 말짱하게 있으니 심심하다. 분위기 속에 끼지 못하기도 한다. 술을 안 마시고도 잘 노는 사람도 있지만 런 사람은 드물다. 어쨌거나 맨정신보다는 적당히 취기가 올라야 재미는 더 있는 것 같다.


기름칠을 해줘야 기계가 잘 돌아가듯 인간관계에도 기름칠이 필요하다. 그 기름칠을 해주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인데 내가 술을 안 마시니 칠할 수 있는 기름이 얼마 없다. 직장 동료나 상사와 술 한 잔하며 얘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관계개선도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물론 술 안 마시고도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술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분명 있다.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 속에서 정이 싹트기 마련이니 말이다.  


술을 못 마시면 타인뿐만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서도 아쉬운 면이 많다. 가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술 마시고 취하고 싶다. 허나 그런 날에 조차 술을 마시지 못하니 우울한 마음은 더 커진다. 20대 때는 집에서 영화보며 소주에 맛있는 안주를 먹다 잠들곤 했는데 요즘은 음식을 조금만 잘못 먹어도 속이 쓰리기 때문에 술은 더더욱 금물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맥주 한 캔에 과자 한 봉지가 나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술이 과해서 문제지 적당히면 마시면 여러 면에서 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나와의 관계에서도 적당한 양의 술은 분명 필요하다. 예전엔 술이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술을 마심으로써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괴로운 마음도 털어낼 수도 있다. 그러면서 힘을 내고 또 다음 날을 살아간다. 뭔가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 없다. 술이라도 잘 마시면 왕창 마시고 취할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때가 많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술 마시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윤택하게 하고 건강도 챙기고,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에 건강을 선택하기로 했다. 술도 못마시냐는 그 정도의 무시는 한 귀로 흘려버려야겠다. 술을 잘 마시고 해야 승진도 빠르다고 얘기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솔직히 승진에 딱히 큰 욕심도 없긴 하지만. 


우리아버지는 1년 365일 내내 술을 마신다. 티브이로 영화 한 편 틀어놓고 안주에 소주 한 잔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해보인다. 그런 아버지가 부럽다.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건강하게 태어나서 술 잘 먹는 사람이 돼보고 싶다. 거나하게 취해 사람들과도 재밌게 놀고 혼자 외로울 때도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소주 한 잔 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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