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명함 만들기

by 기타치는 권작가

직업 특성상 명함이 없다. 개인적으로라도 명함을 하나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내용을 넣어서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다가 문득 오래 전에 만들었던 꿈명함이 생각나서 꺼내봤다.


20대 중후반쯤에 활동했던 한 독서모임에서 활동할 때였다. 어느 날 꿈명함 만들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회사 명함도 아니고 꿈 명함이라?’

처음 맛보는 음식을 씹는 것마냥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신청을 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그려왔던 내 꿈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독서모임 회원중에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중심이 되어 각자 원하는 디자인의 꿈명함을 만들기로 했다.


신청자는 나 포함 4명이었다. 다 같이 모여 먼저 각자의 꿈과 목표에 대해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모인 사람들의 성격과 생김새가 다 다르듯 꿈도 제각각이었다. 평범한 일상에 소음을 일으키는 문화기획자, 통일을 꿈꾸며 새터민 아이들을 돕는 봉사자,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디자이너 등등 모두가 저마다의 꿈을 좇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한창 꿈과 성공을 갈망하던 때라 어마어마하게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꿈 명함에 어떤 내용을 넣을지 고민하다가 그 당시 내가 가장 원하는 5가지의 꿈을 명함에 새겨 넣기로 했다.



○ 한국 제일의 갑부

꿈 명함에 제일 첫 번째로 쓴 꿈은 돈이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돈이 성공의 기준이라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그저 돈을 많이 갖고 싶었다. 소비하기 위한 돈이 아니라 성공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돈을 갖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돈에 대한 욕심도 없고 내 삶에서 돈의 비중이 그리 크지도 않지만 그땐 그랬다.


○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자선가

오래 전부터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었다. 다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지금까지 봉사라고 해봤자 연탄배달봉사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봉사에 대한 열정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소소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안 쓰는 물건이나 안 입는 옷은 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사회적 기업에 기부하고 있고 후원 단체를 통해 현재 5년 째 해외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매달 헌혈을 하고 있는데 최근엔 헌혈 횟수 50회를 돌파해 감사패와 금장을 받기도 했다. 사소하지만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자선가’라는 꿈은 벌써 이뤘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뤄나가야 할 꿈이 아닐까 싶다.

○ 나 자신을 브랜드화한 최고의 장사꾼

사람과 얘기하는 걸 좋아해 서비스업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장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장사를 한다면 나만의 브랜딩이라는 트렌드에 맞춰 나 자신을 브랜드화한 장사꾼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꿨던 꿈이다. 장사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과일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장사가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 외국인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코리언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수가 없었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게 된 이유였다. 한국 사람이 원어민보다 영어를 더 잘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은 내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아주 짧은 문장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서 영어를 그만뒀고 지금은 영어를 놓은 지도 오래 됐지만 가끔 영어를 물 흐르듯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여전히 부럽기는 하다.


○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괴짜 마술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건 좋은 일이다. 남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내가 몇 배로 더 기쁠 수 있다. 내게는 그것이 마술이었다. 중, 고등학생 때 마술을 배웠다. 지금은 마술을 안 한 지 제법 오래 됐지만 간단한 마술 몇 가지는 할 줄 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내가 가진 재주 중 하나이다. 별 볼 일 없는 실력이지만 사람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명함 뒷면에 이렇게 다섯 가지의 꿈을 적어 놓고 제일 밑에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더 넣었다.


‘모든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꿈을 얘기할 때 ‘됐으면 좋겠다.’와 같이 미래 소망형이 아닌 ‘이루어졌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으로 말해야 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덧붙인 문장이다.



몇 년 전에 만들었던 이 꿈 명함을 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이뤘는지 생각해봤다. 결과적으로 명함에 적은 꿈을 거의 다 이루지 못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장사꾼이 된 것도 아니며 한국 제일의 갑부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좌절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꿈 명함에 새겨넣은 목표는 성공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냥 꿈에 부풀어 세웠던 것이었다. 지금보면 허무맹랑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꿈이 나에게는 제법 의미가 있었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만 해도 행복하듯이 성공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가슴이 설레곤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꿈을 찾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거대한 목표를 꿈꿔봤기 때문에 세상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 반대로 아무리 어려워보이는 것도 목표에 집중하며 꾸준히 실천하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울 수 있었다.


삶을 지탱해주는 많은 요소들 중 하나는 바로 희망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우리는 살게 한다. 명함에 새겨넣었던 불가능한 그 꿈들이 바로 내게는 희망이었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앞으로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꿈과 희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 기반이 됐는지도 모른다.




빠듯한 살림살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것들이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힘들겠지만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삶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라고 했다. 내가 어떤 곳을 향해 걷고 있는지,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종이에 적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 마침표를 찍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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