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잘 논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보고 혼자 카페에 간다. 혼자 등산도 다니고 산책도 한다. 혼자 쇼핑도 하고 캠핑도 한다. 혼자라 심심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혼자라 편할 때가 많다. 혼자만의 시간이 퍽 즐겁다.
혼자서 이것저것 많이 해봤다. 앞으로 뭘 좀 해볼까 하던 때 직장 선배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40대 초반의 선배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혼자서 모텔에서 쉬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면 가족에게는 당직이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산 근처에 있는 조용한 모텔로 향한다고 한다.
혼자서 뭐하냐고? 그냥 쉰단다. 창문을 열면 푸르른 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방에서 샤워를 하고 난 후 티브이를 틀어 영화를 본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는 건 필수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알몸의 상태로 자유를 만끽한다. 다음 날엔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아침 늦게까지 잔다.
한 달에 한 번은 그렇게 혼자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고 하는데 자기 말고도 혼자서 오는 남자들이 제법 있다고 했다. 아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기혼남성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택한 나름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보통사람같으면 이런 얘길 들으면 "혼자서 웬 모텔이래? 지지리도 궁상이네."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이야기로 들렸다. 나 역시도 혼자서 숙박을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어렴풋이 생각은 해봤지만 실천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이참에 나도 한 번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어디로 가볼까 하다가 모텔 대신 호텔을 가기로 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바닷가가 보이는 호텔을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운대에 갈 때마다 삐까뻔쩍한 고층의 호텔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언제 저런 데서 한 번 자보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까지 호텔에 가지 못한 건 돈보다 시간이 없어서였고 시간보다는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마음을 먹었다.
"꼭 누군가와 함께 가야하나? 혼자 가면 되지, 뭐 어때"
호텔행을 택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하도 많이 "호캉스, 호캉스!"하길래
'그깟 호캉스가 뭐 그리 대수라고, 나도 가볼 테다!'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29살에 혼자 떠난 45일 유럽여행도 사람들이 하도 "유럽여행, 유럽여행!"하길래 '그깟 유럽여행이 뭐라고 그렇게들 난리지?'하는 생각을 하다가 마침 상황이 돼서 떠나게 된 것이었는데 호캉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여름휴가일에 맞춰 해운대에 있는 한 호텔을 예약했다.
해운대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그린나래 호텔이다. 건물 외벽 전체가 통유리로 돼있어 바닷가 경치를 즐기기에는 최고다.
내가 예약한 방의 거실 모습이다. 호텔에는 10평부터 30평까지 다양한 평수가 있었는데 제일 큰 방인 30평짜리 방을 잡았다. 이왕 놀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생각때문이었다. 비록 혼자였지만 좁은 방에서 있기보다는 넓은 평수의 방 곳곳을 거닐고 싶었다.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그런 갑부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말이다.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뷰가 장관이다. 해운대 바닷가의 경치를 한 눈에 즐길 수 있다. 저 멀리 동백섬과 조선비치호텔이 보인다.
거실뿐만 아니라 침실방과 화장실도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부산 촌놈인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바닷가 풍경을 즐기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한창 집 구경을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호캉스라고 하지만 종일 집에만 있으면 뭐하겠는가? 해운대의 밤바다를 즐기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들이 보인다. 볼 때마다 고품격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같으면서도 삭막해보이는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 너무 멋있어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때가 8월 말이라 해운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기타치는 사람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불쇼를 비롯한 각종 묘기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조선비치호텔 앞에서 기타치며 노래를 부르던 한 중년의 남자였다. 기타도 잘쳤지만 노래를 굉장히 감성적으로 잘 불렀다. 옛날 노래를 좋아했던 터라 그 남자의 선곡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노래에 심취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자리를 잡아 한참동안 그 남자의 노래에 빠져있었다.
또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추억의 8090 발라드 위주로 불렀는데 노래도 좋았지만 몸이 불편해도 노래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런 열정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백사장을 벗어나 도시 속으로 들어가봤다. 안 본 새 거리가 많이 변해있었다. 휘황찬란한 건물들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는 길거리는 마치 내가 외국에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혼자라 적적했는데 볼거리가 다양해서 즐거웠다.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즐기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을 보고 걷고 즐기다 방에 들어왔다. 딱히 할 것은 없었다. 샤워를 한 후 호텔 가운을 입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틀었다. 이런 날엔 맥주는 기본인데 그러질 못했다. 조금만 잘못 먹어도 속이 심하게 쓰려 쉽사리 맥주를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과자안주에 맥주 한 캔을 못 마신 게 못내 아쉬웠다.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티브이에는 볼 만한 영화가 없었다. 결국 노트북을 꺼내 영화를 봤다. 소파에 기댄 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큰 티브이를 통해 영화를 봤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그게 참 아쉽다.
자려고 침실방에 들어왔다. 침대가 무려 2개다. 어느 침대에서 잘까 고민하다가 바닷가가 보이는 창가 바로 앞에 있는 침대에 누웠다. 혼자라 적막하긴 했지만 새로운 곳에서,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멋진 호텔에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체크아웃한 후 바닷가 백사장으로 갔다. 휴가 막바지 철이었지만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넘실대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얼마 만에 보는 바다인가 싶었다.
'역시 바다는 언제 보러 가도 옳다.'
나혼자 호캉스를 떠난 이유
혼자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올해 여름휴가는 혼자서 호캉스를 즐겼다. 혼자 호텔에서 하루 묵었다고 하면 주위 반응은 비슷하다. 웬 궁상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 충분히 이해한다.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호캉스가 나에게는 제법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먼저 혼자서라도 해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혼자라서 못하겠다고 가만히 있기보다는 혼자서라도 해보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 나를 더 성장시킨 것 같아 뿌듯하다.
솔직히 혼자가 좋아서 혼자 호텔을 간 건 아니었다. 혼자보다는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게 더 즐겁다. 그런 점에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연인과 함께 가서 시간을 보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혼자라도 그 나름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동안 부러워하며 생각만 했던 것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많이 즐겨봐야 나중에 후회가 덜 남는다. 할 수 있을 때 해봐야 한다. 호텔에 가보기 전에는 '언제 호텔에서 한 번 잘 수 있으려나.'하고 아쉬운 소리만 계속 했는데 한 번 갔다 와보고 나니 고놈의 호텔, 나도 즐겨봤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하다. 바닷가가 보이는 호텔을 봐도, 호캉스를 즐겼다는 사람들을 봐도 이제는 그렇게 부럽지만은 않다. 예전처럼 시기, 질투를 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한 번 가본 경험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이런 여유가 참 좋다.
남 눈치 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혼자서 호캉스 보내기가 결코 궁상은 아니다. 나는 혼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어차피 이렇게 혼자가 된 거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캉스는 그 생각의 결과물이다. 혼자라 부끄럽다고, 창피하다고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눈 딱 감고 혼자서라도 한 번 해보는 자세가 때로는 필요하다. 자신감이 없다고 내빼기보다는 과감하게 부딪혀볼 수 있는 용기도 중요하다. 기회는 그럴 때 잡을 수 있는 법이다.
혼자 호캉스는 나에게는 나름 도전이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용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고 있고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싶다면, 진정 나로 살고 싶다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처럼 꼭 혼자서 호텔을 가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가면 된다. 생각해보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꽤나 많다. 꼭 혼자여야 하는 건 아니다. 함께 할 수 있다면 함께 해보자.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