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세우는 건 상대를 밀어내는 게 아니야.
거절하는 용기, 사랑하는 용기
“야호! “ 드디어 칭찬스티커를 꽉 채운 아이가 보상으로 아이브(?) 카드를 박스째 사달란다. 가격이 6만 원 정도였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 물었다. "왜 필요해? 엄마는 좀 이해가 안 돼서 미소한테 설명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아." 울기 시작했다. 자기가 칭찬스티커를 이만큼 어렵게 모았는데 왜 안 사주냐는 내용이었다.
기다렸다. 울음이 그치고 울어봤자 안된다는 걸 아는지 꺼억꺼억 숨이 넘어갈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솔직하게 얘기하면 사줄 거야?" 무엇을 솔직하게 말할지 긴장됐다.
"그럼, 엄마는 네 얘기 들을 준비가 됐어. 미소는 준비됐니? 네 얘기를 잘 들을 수 있게 울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얘기해 볼래? 소리 지르고 울면 네 말이 안 들려.”
아주 조금 진정된 미소가 말했다.
“유치원 차에서 아이브 카드를 사랑이랑 교환해. 그래서 카드 사고 싶어. 사줘." 정말 솔직하게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놀랐다. 언젠가 베트남을 여행 갔다 사온 미니가방을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화끈하게 줘놓고 3일 밤낮 ‘주지 말걸 그랬어’라고 울었던 아이였어서 그런 것 같다. 분명 교환의 의미, 내가 무엇을 줄지 말지 아직 판단을 하기 어려운 유치부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환을 위해서라고..?
“엄마, 사랑이가 좋아서 거절을 못하겠어.” 둘째 딸아이가 말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딸아이가 던진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이 요동쳤다. 첫째인 아들을 키우며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가슴 한편에 스며들었다. 딸아이의 말속에는 단순히 친구와의 사소한 갈등이 아닌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 감정이란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것과 거절을 못하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어?”
딸아이는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이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거절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게 어려웠다. 거절은 마치 상대방을 밀어내는 행위 같았고 그러한 선택이 우리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올까 두려웠다.
“아…”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딸아이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모두 거절을 잘하지 못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면서도 이런 순간엔 여전히 내가 미숙하다는 걸 깨닫는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은 답이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답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랑이가 정말 좋은 친구라는 건 엄마도 알 것 같아. 그런데 사랑이가 진짜 좋은 친구라면 네가 거절을 해도 그걸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딸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내가 거절하면 사랑이가 기분 안 좋잖아. 나랑 친구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문제는 단순히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어른들조차도 여전히 겪고 있는 문제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도 거절은 여전히 어렵다.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관계가 틀어질까 봐 혹은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우리는 자주 침묵하거나 억지로 수락하곤 한다.
거절이 주는 부담과 인간관계의 본질
심리학에서는 거절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 배척에 대한 두려움(rejection sensitivity)’으로 설명한다. 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사회적 연결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지만 그 연결이 끊길 가능성을 감지할 때 우리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느낀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불안이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거절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관계 심리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은 “건강한 관계는 갈등을 통해 더욱 깊어진다”라고 주장한다. 거절이 오히려 관계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관계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거절했을 때 상대가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그 관계는 한 단계 성숙해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거절 하나로 관계가 단절된다면 그 관계는 애초에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나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주기로 했다.
“사랑이가 너랑 똑같은 상황이고, 싫다고 말했어. 미소는 사랑이한테 네가 내 마음을 거절했으니까 너랑 친구 안 할 거야.라고 말 할 거니?”
딸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아니. 사랑이 마음도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랑이는 네가 싫다고 하면 너의 마음을 이해해 줄 것 같아? 아니면 이제 너랑 친구 안 할 거야!라고 할 것 같아?”
딸아이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딸의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가 정말 너를 좋아하는 친구라면 네가 싫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 거야. 좋은 친구는 서로 다른 걸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사랑이가 좋아서 네가 불편한데도 참기만 한다면 사랑이랑 노는 게 재미없어질 거야. 네 마음이 중요해. 그렇지 않아?”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럼 사랑이한테 싫은 건 싫다고 말해도 되는 거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네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사랑이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야. 사랑이도 너의 마음을 알게 되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똑같이 사랑이가 너에게 불편하다고 하면 너는 사랑이 마음을 이해해 줄 거잖아. 진짜 친구란 그런 것 아닐까?”
마음의 울타리 세우기
그날 밤 딸의 고민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내가 딸에게 해준 이야기는 곧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였다.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거절이 어렵고 그만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애쓰고 싶어지는 마음. 하지만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결국 나를 상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정원을 가진 정원사다(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필명에서 힌트를 얻었다). 정원 속에는 우리가 가꾼 소중한 꽃들이 피어나고 바람과 햇살 아래에서 저마다의 향기를 뿜어낸다. 하지만 정원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울타리가 없다면 바람결에 씨앗은 날아가고 무심코 스쳐 간 발길에 꽃은 꺾이고 만다. 울타리는 우리 정원을 지키는 경계이자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첫 번째 약속이다.
딸아이가 사랑이를 향한 마음과 거절의 두려움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딸이 자신의 정원을 보호하기를 바랐다. “사랑이가 진짜 친구라면 네 울타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조심스레 들어올 거야.”
딸이 마음속에 울타리를 세울 때 사랑이는 그 안에 핀 꽃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라면 그 꽃을 꺾으려 하지 않고 그 향기를 함께 즐길 것이다.
거절은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초대다. 내가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말할 때 진짜 관계는 그 경계를 이해하고 함께 꽃 피운다. 나의 소중한 딸이 자신의 울타리를 세우며 관계의 품격을 배워가길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나의 정원을 더 단단히 가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미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딸아, 너의 정원에는 네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심어야 해. 네가 스스로를 지킬 때 그 꽃들은 더 풍성히 피어날 거야. 그리고 네 정원을 존중하는 사람만이 그 곁에서 네 꽃의 향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울타리를 세우는 건 상대를 밀어내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정원의 문을 열고 진짜 친구를 초대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이야.”
우리는 모두 마음속 울타리를 세우며 조금 더 단단해진다. 울타리가 만들어 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그리고 진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딸과 나의 정원이 아름답게 피어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