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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인 Aug 04. 2019

리얼돌, 생각보다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기자는 이렇게 살고 또 취재합니다 #리얼돌 취재 후기

박태인 기자입니다. 이젠 기레기라는 용어가 더 익숙한 기자라는 업(業)을 맡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취재하는지, 이들의 애환은 무엇이며 어떤 고민과 부딪치는지를 기록하려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선택에 놓인 저희들의 삶을 연재해보려 합니다. parktaeinn@gmail.com
리얼돌과 사랑에 빠진 일본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상. [유튜브 캡쳐]

"아, 그거 어젯밤에도 고민을 했는데 정말 어려운 문제에요"


리얼돌 논란 취재 시작하며 먼저 검사 출신인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법적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오 변호사는 검사 시절 대검찰청에서 여성 권익 관련 업무를 맡은 경험이 있습니다. 청와대 청원에도 등장한 리얼돌 문제에 관심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감이 적중했습니다. (특정 이슈에 대해 고민을 한 취재원과 그렇지 않은 취재원의 답변은 큰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고민을 할수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 변호사는 "리얼돌을 쉽게 반대하기도 찬성하기도 어렵다"며 "리얼돌이 개인용 성기구인지 음란물인지, 리얼돌의 사용이 실제 성범죄를 증가시키진 않을지, 리얼돌이 영화 'her'에 등장하는 AI처럼 진화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문제"라고 했습니다.


AI라...통화를 할 땐 손뼉을 치고 공감을 했지만 기자는 사실 취재원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 이거 복잡한 문제인데 괜히 나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엄습해 오기 때문입니다.

리얼돌과 사랑에 빠진 일본 중년 남성을 다룬 NBC다큐

리얼돌을 묻자 돌아온 모두 다른 답변들


오 변호사을 시작으로 리얼돌 논란에 대해 판사와 검사 출신 변호사, 남성과 여성 변호사, 여성 단체 관계자 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모두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한 남성 변호사는 "리얼돌은 성기구다, 이젠 남성의 성적 상상까지 금지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말했고, 여성 변호사인 주영글 변호사(법률사무소 해내)는 "남성이 특정 여성을 형상화한 리얼돌을 만들어 성행위를 하는 경우 그로 인해 여성이 받을 정신적 고통은 강제추행보다 가볍지 않을 수 있다"며 "실제 인물을 재현하는 리얼돌의 제작과 수입 판매 모두 강하게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법원까지 갔던 법원 판결도 찾아봤습니다. 이번 논란은 2017년 7월 리얼돌이 "선량한 풍속을 해친다"며 수입을 금지한 인천세관(정부)과 리얼돌을 수입하겠다는 수입업자의 소송에서 불거졌습니다.


1심은 인천세관의 승. 2·3심은 수입업자의 승. 이 소송은 대법원이 지난 6월 상고기각 결정을 내리며 끝났습니다.


상고기각이란 대법관들이 2심 판결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때 내리는 결정입니다. '2심 결정 유지'란 뜻이죠. 그렇게 리얼돌의 국내 수입이 허용됐고 두 달만에 맞춤 제작이란 새로운 사회적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아마존에서 약 500달러에 판매 중인 리얼돌의 모습. 실제 여성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제작됐지만 원클릭에 구매가 가능하다.

1심 "리얼돌 인간 존엄성 해쳐" 2심 "리얼돌 수입이 인간 자유 실현해"


리얼돌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9월 내려진 인천지방법원(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리얼돌을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 왜곡하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사람의 특정한 성적 부위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며 사회의 선량한 풍속을 해친다고 규정했습니다.


리얼돌이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일반적인 성기구와는 다른 특성이 있기에 수입해선 안된다는 결론입니다. 판결문은 4페이지로 짧습니다. 재판부는 리얼돌의 '음란성'에 초점을 맞춰 법리를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1월 내려진 서울고등법원의 결정은 정반대였습니다.


2심 재판부는 리얼돌은 성기구이며, 성기구는 "인간이 은밀하게 행하는 성적 행위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매우 사적인 공간에서 이용되는데, 사적이고도 은밀한 영역의 개인적 활동에는 국가가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 된다"고 밝혔습니다.


리얼돌 문제가 '개인의 사적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의 최소화'라는 법철학 문제로 확장된 것입니다. 2015년, 26년만에 사라진 간통죄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4일 현재 리얼돌 수입금지 청와대 청원. 25만명 이상이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란성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한다"


2심 법원의 결정엔 '음란성의 사회적 배경'에 관한 내용도 등장합니다. 재판부는 "음란성은 사회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동하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이고 나라마다 판단을 달리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사회통념이나 성적 도의관념이 (정부가 제출한) '성기구 수입 금지 국가들과 유사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문화가 리얼돌을 허용할 만큼 개방됐다는 취지입니다. 이 판결을 곱씹어보면 특정 문제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그 시대의 '공기'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향후 리얼돌을 넘어 AI와 로봇까지 등장하는 시대에 법원의 결정은 지금과 또 다를 것입니다.


리얼돌에 피해 입는 여성 발생할 수도


하지만 리얼돌 문제는 법원 결정으로 정리될만큼 간단지 않습니다. 맞춤 제작 논란은 물론 리얼돌이 유튜브 등 SNS와 맞물려 음란 콘텐츠나 여성 혐오의 도구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초 2심 법원에서 리얼돌에 대한 판단을 내릴 당시 이런 사회적 맥락까지 고려하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상을 했을지라도 이 문제는 법원이 아닌 사회적 논의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노영희 변호사(법무법인 천일)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 비슷하게 생긴 인형이 성기구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알았을 때 입을 정신적 충격과 인권 침해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성적 자유가 무한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리얼돌 수입을 허가한 법원 결정에 '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영글 변호사는 "특정 인물을 형상화한 리얼돌과 성행위를 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 경우 해당 인물이 성관계를 맺은 것처럼 오해를 일으켜 인격권이 침해될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리얼돌에 대한 법원의 정의와 사회적 소비 맥락에 괴리


지금 유튜브에 '리얼돌'을 검색하면 각종 리얼돌 '체험기 영상'이 등장합니다. 리얼돌이 개인 성기구로서 은밀히 사용되지 않고 동영상 플랫폼 등을 통해 일종의 음란물로 공개 소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리얼돌에 대한 법원의 판단과 실제 리얼돌이 소비되는 맥락 사이에 괴리가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 문제에 쉽게 나서기도 어렵습니다. 대법원이 리얼돌의 수입을 허용한 상황에서 나정부의 대책이 리얼돌 찬반론자 모두를 만족시키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미 올해 2월 https관련 차단 기술을 도입했다 일부 포르노 사이트가 막히자 남성들의 거센 반발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리얼돌 수입금지 청와대 청원이 20만명을 넘어 정부는 최소한의 답변은 내놓아야 합니다. 당국자들의 고민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 리얼돌 판매 웹사이트 화면 캡쳐.

리얼돌, 여성 혐오와 남녀 대결의 도구로 소비되기도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대표는 "리얼돌이 일종의 여성 혐오 도구로 소비되는 경향이 눈에 띈다" 시각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리얼돌 관련 기사의 댓글이나 SNS에서 리얼돌 연관어로 '탈김치녀' 등의 여성 혐오 단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서 부대표는 "한국 여성들과 만나지 말고 리얼돌을 사라"와 같이 리얼돌이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데 사용되는 점과 "여성의 형상이 남성의 욕망에 따라 성기구로 전락되는 것 역시 여성 혐오적"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남성이 리얼돌을 찬성하지도 않고, 모든 여성이 리얼돌을 반대하지도 않지만 '리얼돌을 찬성하면 남성, 리얼돌을 반대하면 여성'이란 성대결적 구도가 생겨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두 달 전 수입 허용이란 대법원의 결정이 내려졌지만 취재를 할수록 리얼돌에 대한 진짜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여유가 되신다면 의견을 담은 댓글 한번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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