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태인 Aug 11. 2019

현직 판사와의 조금 긴 인터뷰

#기자는 이렇게 살고 또 취재합니다 #박주영 판사 인터뷰 후기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의 모습. [사진 김영사]

현직 부장판사가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어떤 양형 이유'이며 저자는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입니다. 양형 이유란 판사들이 판결문 말미에 적는 형(刑)의 이유를 뜻합니다. 죄를 뉘우치고 있다면 피고인에겐 형이 감해질 수 있는 유리한 양형 이유, 증거가 차고 넘치는 데 혐의를 부인한다면 형이 늘어나는 불리한 양형 이유입니다.


박 부장판사는 이 양형 이유 란(欄)에 판사로서의 고민과 문학적 표현을 담아 쓰기로 법조계에선 제법 알려진 판사입니다.


그렇게 집어 든 '어떤 양형 이유'는 제 기대를 뛰어 넘었습니다. 판사가 이렇게 과감하고 솔직히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한 책은 참 드뭅니다. 성범죄와 산재, 가정폭력, 소년범 재판에 대한 이야기부터 판사를 비난하는 사회와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개인적 소회까지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법원을 취재하는 기자라 판사들을 직접 만납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어떤 현직 판사를 만나도 들을 수 없는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박주영 부장판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A4용지 9쪽 분량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11일 오전 인터뷰 기사를 출고했지만 답변을 모두 담진 못했습니다. 전문은 아니지만  기사에 담지 못한 인터뷰 내을 브런치에 싣습니다.


박주영 부장판사 인터뷰

Q:판사가 되어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A:판사직을 그만둘까 생각은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변호사 시절이 그리워 판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성공한 판사가 아니지만(판사로서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해 두고 싶군요), 변호사로서는 확실히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근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생생한 삶의 현장, 그 고통의 열기를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계속 변호사로 있었더라면 저는 그 열기에 녹아 없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박 부장판사는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 경력법관 제도로 판사가 됐습니다.


그렇기에 판사로 임용되었을 때 많이 기뻤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저는 판사로서 행복합니다. 아직도 저는 아침마다 늘 제가 있기에는 과분한 곳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법원으로 출근합니다. 제게 판사의 직책은 정말 과분한 꽃길입니다. 판사로서 역할의 막중함, 무거운 책임과 크나큰 권한, 명예, 안정적 삶 모든 것이 다 과분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과분하게 생각하는 것은 동료들입니다.


제가 판사생활만 한 분들께 늘 하는 말이 있는데요. ‘당신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 실감하지 못한다. 법원 밖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변호사는 엄청나게 외롭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 주변의 동료판사들처럼 누구도 진지하게 당신 사건과 삶을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Q:판사가 실명 비판을 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판사들은 사회적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A:박 기자님은 판사들이 사회적 비판에 신경을 안 쓰는 것으로 보이시나요? 겉으로 대범한 척, 시크한 척 하지만 저도 무수히 상처받고, 주위 판사님들도 숱하게 속상해합니다. 단지, 짐짓 의연한 척 표현을 안 할 뿐이지요.


최근 워낙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건에 대한 재판이 많았고, 또 SNS와 같은 전파성 강한 매체의 등장으로 거의 실시간으로 판결과 판사, 법원에 대한 비난이 뜨고, 이해관계에 따라 비판도 다양한데요. 비난은 판사의 숙명입니다. 다만,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서만은 과도한 비판을 자제하고 신중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울이 놓인 탁자를 흔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난은 판사의 숙명입니다. 비판에 위축될 정도로 자신이 없다면 판사직을 그만둬야 합니다.

그렇다고 판결이나 판사, 법원에 대한 비판을 봉인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판결도 비평의 대상입니다. 판결 비판이 재판의 독립에 영향을 미치고 어쩌고 하는 것은 우습습니다. 그런 비판에 위축될 정도로 자신이 없다면 판사직을 그만둬야 합니다.


저 역시 댓글을 보면서 부끄럽고 민망하고 속상한 적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책에도 썼듯 뺨을 후려치는 눈보라는 피할 수도 없습니다. 옷깃을 잘 여미고 눈보라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눈보라가 싫다고 집에 숨어있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 갈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박주영 부장판사가 보내준 인터뷰 답변 중 일부


Q:책에서 사법농단에 대한 소회도 밝히셨습니다. 이 사태 이후 판사와 법원은 무엇이 변화한 것일까요

A:박 기자님은 누구보다 법원에 가까이 계시는데도 변화를 못 느끼셨나 보죠? 당연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판사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얘기 안 하죠. 털어놓지 않으니 속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가족보다 열 배는 오래 시간 같이 있는 밥조(같은 재판부에 속해 함께 밥을 먹는 판사들)조차도 다른 판사 내면의 깊은 속사정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 사건을 전후해서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우리 사법시스템은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소수 자원을 판사로 뽑아 이들을 도제식으로 강하게 단기간 훈련시킨 다음, 이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해 온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잘 유지하려면 제도에 비판적이거나 문제의식을 가진 판사가 나오면 안 되죠. 이런 사람이 있으면 시스템이 잘 안 굴러가니까요. 그러니 서열, 근무평정, 연임, 인사상 불이익, 승진, 해외연수 등을 가지고 관리한 거죠.


법원에 와서 보니 판사들의 자기검열과 윗사람이나 주변 눈치보기, 위축감 등이 엄청나더군요. 갈매기 대형으로 걷거나 연수원 기수대로 등산한다는 건 애교고, 게시판에 간단한 의견 하나 올리는 것도 비장하게 하는 판사들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관리하고, 목소리를 막다가는 크게 한 번 사달이 나리라 예상했습니다.


판사들의 자기 검열과 윗사람이나 주변 눈치보기, 위축감이 엄청 나더군요

또 하나, 사법농단 사례의 대상이 대부분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법원의 기능과 역할, 존재이유에 대해 판사들이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딱히 먹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바닥을 기웃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말이 너무 근사하게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법농단 사태를 겪으며 입이 백 개 쯤 되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판사를 감시하고 길들이려 했다는 부분은 그래도 봐 줄만 했습니다.


그렇게 굴복한 판사는 자격이 없는 것이고, 불이익을 감수할 것인가는 자유의지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만 다치면 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 싱글로도 모자라 더블, 트리플, 쿼드러플로 핸디캡을 가진 강제노동 징용자들, 위안부 할머니들, KTX 여승무원들과 같은 이들을 기망하려 시도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사법부의 독립, 판사 개개인과 구체적 재판의 독립, 자기검열에 따른 위축, 틀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판단과 보신주의, 적당주의, 두루두루 원만해야 한다는 처세에 대한 강박’과 같은 문제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진지한 내면의 거울 앞에 서서 그 문제를 직시하게 된 것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처세에 대한 강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편을 나눠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정말 보기 불편합니다, 이번 사태가 분열을 넘어 다소나마 판사들 서로를 증오하게 했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 지점입니다


Q:책에는 성범죄와 산재 등에 대한 박주영 판사 개인의 의견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A:사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입니다. 재판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심증개시입니다. 이 글이 재판은 아니지만, 제 개인의 재판관, 가치관, 세계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므로, 제 법정의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심증, 혹은 선입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걱정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그럴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혹 성범죄 피고인들은 저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고, 산재나 노동 관련 사건의 사용자 측은 저를 친노동자 성향의 판사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판사도 공동체의 일원이고, 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에서 밝힌 제 견해가 완전히 예외적인 견해라거나 일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모를까, 보편적 법리나 일반적 가치관의 큰 부분에 기댄 것이라면 용인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구체적 재판에서 판사의 심증이 미리 드러날 경우 문제가 되겠지만, 저는 오히려 너무 법원 건물 안, 법대 뒤에 꽁꽁 숨은 게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그 은비隱秘감이 국민의 법원을 바라보는 시각을 악화시켰다고 봅니다. 뭐 숨길 게 있다고, 뭐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뭐 그리 고결하고 잘 났다고 숨어 있습니까.


Q:판결문의 양형이유는 대부분 형식적입니다. 문학적 비유 등을 남긴 이유가 있으실까요

A:감정적 언어나 비유가 더 적절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적어도 양형의 이유 부분에서는 메마른 문장보다 따뜻한 언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은유나, 상징이나 비유가 숨쉴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들이 실은 우리에게 더 익숙한 것들이니까요.


아동성범죄에서 “어린 아이를 성폭행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죄질이 극도로 불량한 악질적인 범행‘이란 표현보다, ’영혼의 살해‘라는 표현이, 산재사건에서 ‘노동자들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안전 불감의 세태가 개탄스럽다’라는 표현보다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표현이,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허용될 수 없다’는 표현보단, ‘내 주먹을 휘두를 권리는 얼마든지 행사해도 좋지만 반드시 상대의 코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 아닐까요?


저는 궁극적으로 성공한 재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움직여야 분쟁과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여야 피고인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속죄하며, 피해자가 위안받고 치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을 하고 싶어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Q:책에는 과로로 목숨을 잃은 동료 법관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A:그래서 제 동료들과 법원 직원들의 비보가 들려오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책에도 썼듯 어느 집단이던 우리는 과로사회에 속해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겠지요. 판사들과 법원 구성원들 개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궁극적으로는 재판의 충실화를 위해서라도, 액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살짝 한두 번만 밟았으면 좋겠습니다. 속도를 조금만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갖가지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고민할 만큼 합리적 시간이 부여되어 있는지에 대해 늘 합리적 의문이 들더군요. 부디, 그렇게 브레이크가 걸리는 구간에서는 다들 늦게 간다고 욕하지 마시고, 아 ‘기사도 피곤하구나, 사고를 막으려면 좀 천천히 갈 때도 있어야지’하고 생각해 주셨으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박 기자님도 이미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과연 승객들이 이 상황을 용인하느냐에 달려있겠죠.


액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살짝 한두 번만 밟았으면 좋겠습니다

Q:책을 읽은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길 바라시는지

A:큰 바람은 없고, ‘판사들 이거 우리하고 영 딴 나라에 살면서 형편없는 인간들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금 봐줄만하네’ 정도로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뭐 대단한 인격자들로 기대하신 분들이나, 반대로 대단히 악질적인 인간들로 생각하신 분들께는 다소 실망스러운 말씀이지만 판사도 똑같이 지질한 인간들입니다. 크게 뛰어나지도 크게 나쁜 인간들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판사는 지질한 보통사람인데, 엄청나게 큰 힘을 갖고 있어서, 그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쩔쩔매는 사람’입니다. 어벤져스로 치면 평소에는 소심한 브루스 배너 박사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헐크 같다고 할까요. 그 막강한 힘 때문에 때론 주위에서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꺾으려고 들지만 통제가 쉽지 않은 존재죠. 제 기억이 맞는다면 헐크를 가장 잘 통제한 사람은 브루스 배너 박사가 좋아한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가 아닌가 싶네요.


판사도 질책하고 비난하고 때론 윽박질러야 할 존재입니다. 헐크만큼 위험하고요. 다만, 가끔 가다 당사자들의 '수고하셨다’는 다정한 말 한 마디에 힘이 나서 밤 새워 판결을 쓰고, 정말 어쩌다가 받는 감사의 편지 한 통에 남은 판사 생활이 확 달라지는 게 바로 대한민국 판사들 같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바로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리얼돌, 생각보다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