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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인 Oct 13. 2019

신상이 털린 기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기자는 이렇게 살고 또 이렇게 취재합니다

Photo by Elijah O'Donnell on Unsplash

출근이 전쟁같단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법원과 검찰을 출입하며 조국 법무부 장관을 취재하는 모든 기자들은 사실 똑같은 심경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전쟁터에 나간다는 기분.


조 장관 기사를 쓸 때마다 수백, 수천개의 욕설 댓글이 달리고 수십개의 욕설 이메일이 들어옵니다.  달 전 조 장관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신상을 털렸습니다. 저를 오랫동안 알아왔던 독자저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 기사 제목에 거친 욕설을 쏟아냈습니다.


"너 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분도 계셨고 "기레기새끼, 그럴 줄 알았다"고도 했습니다. 공지영 작가를 포함해 수백명의 SNS 유저는 제 사진과 이력을 자신의 타임라인에 올리며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제목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단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오해를 해 미안하여당 관계자

그때  한 여당 관계자도 저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제가 최근 쓴 정 교수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오해를 해 미안하다, 이번 기사는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모두 박태인이란 똑같은 기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저는 적과 동지를 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조 장관이 케이크를 들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찍어 기사를 썼던 제 선배도 제가 기사를 쓴 날 신상을 털렸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 사진을 본 떠 만든 이미지 파일이 조 장관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기자에게 욕설을 쏟아내게 만든 그 사진이 조 전 장관의 상징이 되버린 셈입니다.


조 장관 지지자들은 이 사진을 찍은 김태호 기자를 비난했지만 이후 이 사진은 조 장관 페이스북 프로필에 등장한다.


저는 중앙일보 사회팀에 속한 기자입니다. 이 사실만으로 어떤 독자분은 이 창을 닫으시거나 욕설 댓글을 쓰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오늘 몇가지 말씀드리고 싶어 용기를 내 이 글을 씁니다.


우선 기사 부족다면 죄송하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많은 기자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과 범위에서(또는 그 영역을 넓히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당신 진영에 서있는 '대충하는 기자'보다 당신 반대 진영에 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기자'가 더 나은 기사를 쓸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좌우 모두에게 신상을 털렸던 경험들

저는 올해 세 번 정도 신상을 세게 털렸습니다. 정 교수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두 번은 분류를 하자면 좌파가 아닌 우파 독자들에게 비난 받았습니다. 첫번째는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게 살해협박을 했던 보수 유튜버를 비판했을 때였고 두번째는 헝가리 다뉴브 참사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이들를 비판했을 때였습니다.


세 기사 모두 100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읽었고, 그 세 번 중 두 번은 '태극기 부대'를 포함해 우파 진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독자들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반면 그 당시 그분들과 반대편에 있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죠. 저는 좌파와 우파 독자 모두에게 신상을 털린 셈입니다.


다뉴브 참사 칼럼에 한 독자가 남긴 댓글.


모두 그 당시에 제가 현장에서 취재한 팩트와 거기에 대한 저의 판단, 그리고 제 판단을 믿어준 회사 선배들에 의해 기사가 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논쟁적인 기사를 쓸 때마다 한쪽 독자에겐 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무력감에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기자에 대한 비난은 언론사가 아닌 기자 개인이 감당합니다

'기레기'가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한국 사회에서 기자가 받는 비난의 강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직업을 가졌는데 비판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신상털이와 비난을 한 분들에게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들어, 특히 조국 장관 취재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기자 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기자가 속한 언론사는 기사의 영향력을 높여줄 수 있지만, 기자가 받는 비난을 대신 받아주진 않습니다.


제가 쓴 기사의 비난은 오로지 제가 받아내야 합니다. 기자는 비난을 받을 때 철저한 개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기사의 잘못과 오류가 있다면 그 책임 역시 기자가 져야합니다.


남성 기자인 저와 달리 여성 기자들에겐 그 비난에 '성적 용어'가 더해집니다. 한 선배 기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성적 비난을 한 네티즌을 고소했습니다. 그분이 선배에게 전한 반성문에는 '딸을 둔 아버지로써 사과드린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비판하는 직업인만큼, 비판받는 것 역시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과없이 쏟아내는 욕설에 이 업계 안에서, 그래도 고민을 하고 조금 더 노력을 하는 기자들이 진절머리를 내고 떠나진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기자를 그만두는 '좋은 동료'를 볼 때마다 자꾸 저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좋은 기사를 쓰면 되지 않느냐""팩트에 기반한 기사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독자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팩트가 무엇이냐""그래서 좋은 기사가 무엇이냐"고 되물었을 때 이를 정의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각자가 읽고 싶은 것, 각자가 원하는 내용이 담긴 기사만 클릭하고 읽는 세상에서 이제 '좋은 기사'란 "내 편에게 유리한 기사""내 생각과 비슷한 기사"로 전락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상을 털리고 약 한 달 정도 (브런치) 휴식기를 가졌습니다. 비난의 한복판에 섰을 때는 정말 숨고 싶었습니다. 제 사진이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리트윗와 공유하기를 당할 때는 두려웠습니다. 저를 잘 모르며 저를 잘 안다는 듯이 비난하는 분들에겐 직접 전화를 걸어 해명하고 싶었습니다. 아내에게 화도 많이 내고 숨이 막힐 것 같다며 지방에 바람을 쐬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다시 숨지 않고 브런치에 기록을, 제 기억을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씁니다. 하지만 여전히 출근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습니다. 내일 또 "전선에 나가는구나"라는 생각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합니다. 제 기사에 상처를 받은 분들이 계시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매일 조금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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