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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인 Oct 21. 2019

신문기자가 본 영화 <신문기자>

#기자는 이렇게 살고 또 이렇게 취재합니다

※영화 신문기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신문기자 일본 포스터

신문기자 나는 기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꼭 챙겨본다. 


꿈꿔왔던 기자의 모습영화에서라도 보고, 돌아온 현실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한 동기부여를 얻고, 종종 쓰레기에 비유되는 내 직이 아직 영화 소재로 사용된다는 위안을 받으기자 영화를 본다.


결혼 기념일인 20일 아내와 함께 영화 <신문기자>를 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내가 나의 마음을 알고 먼저 영화를 보자고 해준 것 참 고마웠다. 저녁엔 미슐랭 식당에서 1주년을 기념했다)


<신문기자>는 박평식 평론가가 무려 별 3개를 부여한 수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일(反日)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반언(反言) 감정 때문인지 상영관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소규모 개봉을 했다. 일본에선 드문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영화임에도 관객 40만명을 돌파하며 순항 중이라 한다.


"그래, 요즘 한국에서 누가 기자 영화를 보겠어"생각으로 찾은 영화관예상외로 많은 관객이 자릴 채웠다. 10분 한다던 광고 20분이나 나온 뒤 러닝타임 113분이 아주 빠르게 흘렀다.


영화에서 박수를 쳤던 장면

<신문기자>는 내가 원했던 대부분의 것 담겨있는 영화였다. 이상이 담겼고, 내가 겪는 현실 중 일부가 정확히 묘사됐다. 기자는 참 중요한 직업으로도 묘사됐다. 중앙일보 관련 기사


영화 신문기자 한국 포스터.

정확성과 관련해선 한 예로 영화에서 요시오 에리카(심은경)가 일본 내각성의 부정한 행위를 밝혀낼 결정적 문서를 발견한 장면이 있다.


난 속으로 "아 저 정도 증거론 기사 쓰기 어려운데, 영화에선 그냥 쓰겠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시오카가 "이 정도론 쓸 수 없다, 증거가 더 있어야 한다"는 대사를 치며 공무원인 스기하라를 밀어붙이는 것 아닌가. 거기서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래 저기서 딱 반걸음만 더 나아가면, 1면에 기사를 박을 수 있겠다" 요시오카는 거기서 반걸음이 아닌 두 걸음을 더 내딛는다. 그리고 대문짝만한 폭로 기사를 1면에 린다.


두 종류의 기자, 두 종류의 공무원

<신문기자>에는 두 종류의 기자와 공무원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내각 추문을 제보하고 자살한 공무원 칸자키 장례식에서 고2딸에게 아버지의 거짓 추문을 묻는 기자들과 그들에게 "그런 질문을 한 당신들은 제정신이냐"고 말하는 요시오카.


언론에 거짓뉴스에 가까운 정보를 흘리며 정적을 제거하는 내각정보실장 타다와 그 내각이 숨기고자 하는 정보를 언론에게 흘는 내각 소속 공무원 칸자키와 스기하라.


아마 많은 한국 관객은 숨진 칸자키의 장례식장을 찾아 딸에게 무례한 질문을 쏟아내 기자들과, 정부가 흘려주는 일방적 정보를 사실인 듯 써주는 기자들을 보며 한국 언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그래 '기레기'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런 서글픈 안도감이랄까.  


Photo by Vincent Delegge on Unsplash

흘림(leaking)의 선과악에 관하여

 역시도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영화에서 내가 더 주한 것은 영화 속 공무원끊임없는 '흘림(leaking)'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에선 내각성을 아베의 장기집권을 묘사하듯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관으로 그린다. 하지만 영화 막판 요시오카의 '결정적 한방'이 나오기 전에도 내각성은 언론사들의 간헐적 폭로 기사에 여러 난관을 마주하게 된다.


내각성에서 '댓글 조작'을 한 뒤 터져나 언론의 폭로, 요시오카의 상사 진노 기자가 현장 기자들에게 "특종을 뺏겼다"며 질책하게 만드는 또다른 폭로. 그 기사들은 영화의 주인공인 내각성 공무원 스시하라뿐 아니라 다른 익명의 공무원들의 '흘림' 없이는 불가능한 기사들이었다.


영화을 보며 공무원으로 흘려선 안되는 정보가 언론을 통해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것, 그래서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그 흘림의 역설에 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특종의 대다수도 공무원이 흘려선 안되는 정보를 흘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감찰을 받고, 검찰 조사를 받는 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흘림은 정말 나쁜 것이었을까. 그 공무원은 국가에 해악을 끼친 것일까. 그 공무원은 왜 나에게 그런 정보를 흘려줬던 것일까.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 대해

<신문기자>를 보며 최근 한 논란도 떠올랐다. 법무부 장관 수사에 관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논란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와 공무원의 '부정부패 폭로'는 다른 성질의 것일  있다.


하지만 두 흘림의 차이를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경계선이 존재한다. 첫째로 "공무원으로서 흘려선 안되는 것을 흘렸다"는 공통점, 둘째로 검찰 수사가 권력의 외압을 받았을 때(조국 현안을 제외하더라도) 검찰이 이 압력을 뚫고 나가려 언론보도를 이용한다면 그 흘림의 목적과 의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에 관한 것이었다.


2016년 국정농단 특검을 취재했던 한 자는 "당시 특검의 공식 브리핑을 듣고 쓴 단독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특검에 속한 검사와 수사관들은 언론에 피의사실을 흘리며 국민적 관심이란 수사 동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수차례 재청구해 결국 구속시켰다.


당시 검찰의 흘림(피의사실 공표)과 지금 조 전 장관 수사에서 시민들이 손가락질하는 검찰의 '흘림의혹'(최소 검찰은 나에게 아무것도 흘리지 않았다)을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행법상 검찰이 기소하면 피의자의 공소장이 공개될 것이기에 피의사실 공표 금지는 '알 권리의 지연'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공감한다. 하지만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기소장은 결국 수사에 대한 검찰의 결론이다. 그 결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무엇이 덮였는지는 공소장만을 가지곤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 현직 검사장은 "우리가 비공개로 불러 조용히 수사하고 조용히 덮으면 언론이 검찰을 견제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덮힐 수사는 덮힌다는 주장이다.


폭로의 이중성과 내적 분열

<신문기자>에서 요시오카가 써낸 기사 역시 내각성 소속 스기하라가 공무원 비밀 유지의 의무를 저버리고 내부 정보를  않았다면 불가능한 기사였다.


정의를 위해 규범을 어겨야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정부가 부인하면 내 실명을 쓰라"던 스기하라가 요시오카에게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스시하라의 고민을 여실히 드러다.


평론가 박평식은 <신문기>자에 3점을 주며 "받아쓰기에 환장한 '하이에나 언론'을 생각한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정부나 검찰이 주는 일방적 정보를 그저 받아쓰며 남을 물어뜯는 기자와 기사 이제 지양돼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기사 역시 누군가가 '흘린' 정보를 기자가 받아쓰는 측면이 크다. 흘림 없 좋은 기사를 쓰기는 정말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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