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매서운 추위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에 기대어 한동안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눅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세상이 하얗게 변하면 어른의 눈에는 대개 치워야 할 일부터 떠오른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을 디딜 때마다 선명하게 남는 자국을 보며 걷다 보니, 이 눈이 마치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펼쳐진 커다란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내려다보는 순간, 시간은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러간다. 겨울방학이면 찾던 외할머니댁의 풍경이다. 기억 속 시골은 언제나 이 발자국처럼 또렷하고 조용했다. 사실 나는 손주들 가운데 특별히 예쁨을 받던 아이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무뚝뚝했고, 나는 그 무심함이 서운해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집은 좋았다. 아궁이에서 나던 짚 타는 냄새, 방 안에 고여 있던 묘한 평온, 눈이 내리면 세상과 잠시 단절되던 마을의 적막함. 다정한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 느껴지던 안도감은 지금도 내 마음의 바닥을 받치고 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정처 없을 때면 나는 논산으로 향한다. 이제 할머니는 그곳에 계시지 않지만, 논산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하얀 눈 위를 걷다 멈춰 서서 발자국을 내려다본다. 그것들은 단순한 이동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잊고 지냈던 평안함으로 향하는 이정표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논산에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겨울은 춥지만,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은 따뜻하다. 내가 남긴 이 발걸음이 결국은 내가 사랑했던 기억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의 추위는 견딜 만해진다. 조만간 짐을 챙겨 논산으로 떠나야겠다.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눈부시게 하얬던 그 시절의 겨울 풍경을 다시 가슴에 담아오고 싶다. 그러면 다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그 평안함의 온기로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