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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Dec 18. 2021

일이라는 것

 "뭐든지 일이 되면 재미없는 거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데서 끝내야 돼."


 줄거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영화의 한 대사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정말?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은 '그럼 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의문이 남아있는 한 고민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불안했던 취준생 시절, 대기업 몇 군데에 이력서와 자소서를 제출하고 서류 광탈 러시를 당하면서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간절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원이 되려는 동기와 포부를 쓰는 것은 세상 어떤 글을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진심이 아니었던 글들은 불합격 통보 메일만큼이나 휘발적이었고, 가끔은 죄책감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니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임한 채용 과정에서 합격을 한 셈이다. 나는 2014년 축구전문매체의 기자가 됐다. 합격 전화를 받은 장소는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모 연구원의 옥상이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쌓여있었다. 담담하게 통화를 마치고 혼자 뿐인 옥상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3개월의 수습 기간은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는 갓 중학교에 입학해 교복과 머리칼을 흐트러짐 없이 정돈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아 수업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진행되는 아이템 회의와 기사 작성, 사정없는 피드백, 지옥철 출퇴근, 첫 사회생활, 눈치싸움 등은 분명 고된 일이었지만 그리 지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멀게만 느껴졌던 축구 스타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한다는 것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기했고, 기자증을 목에 걸고 취재 현장을 누빌 때면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각성과 흥분 상태로 인한 마취 효과였을까? 수습기자 일과 석사 논문 준비를 병행하던 2014년 상반기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축구 스타들과의 대면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아 질 무렵 나는 그것이 뿌듯했다. 내가 축구팬이 아니라 축구판에서 일하는 프로페셔널한 사회인이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장에서의 긴장감도 줄어들었고 취재나 기사 작성에 관한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축구 한 시즌을 가득 채운 다음이었다.


 지친다는 느낌을 처음 받은 때는 두 번째 시즌이 중반을 넘어갈 즘이었는데,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였지만 그것들을 가만히 생각할 여유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와중에 가장 힘든 것은 나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그렇게 축구가 좋다며 인생을 걸 수도 있겠다던 어린 날의 패기가 이렇게 빨리 사그라지다니. 져버렸다. 무엇한테 진 것인지 몰라도 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거꾸로 축구팬이 돼야 했다. 휴가를 내 고향집에 가서 내가 축구팬이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추억의 물건들을 파헤쳐, 보고 또 보았다. 축구로 웃고 울었던 과거의 시간 중에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내게서 '축구'를 빼앗아간 '축구'를 원망하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조의 시간을 가졌다.  


 축구기자가 되려고 쓴 자소서에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이 되고 '잘 사는 일'이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적었다. 아니, 그렇게 적었더라.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축구를 좋아한다. 축구기자 일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이 일을 잘 하고 있는지는 매일 헷갈린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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