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체조 여자 도마 결선. 예선 1위로 결선에 오른 미국의 제이드 캐리가 1차 시기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도움닫기 과정에서 발이 맞지 않아 구름판에 발을 제대로 구르지 못하면서 정상적인 도약에 실패한 것이다. 기술을 시도하지조차 못하고 매트에 발을 디딘 캐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체조에 문외한이지만 올림픽 때만큼은 도마를 챙겨보는 편이다. 아름답고 잔인한 스포츠 미학의 정수. 실눈을 뜨고 보게 될 만큼 괴롭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인간 신체의 역동성을 마주하는 쾌감은 대단하다. 이 괴로움과 쾌감은 도마의 러닝타임이 4~5초에 불과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그 찰나를 위해 수년간 땀 흘려 기술을 연마했을 선수들을 생각하면 가엾음에 몸서리가 쳐진다.
연민으로 시작된 몰입이 과몰입이 되는 것은 그런 때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캐리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보통의 그라면 하지 않을 실수)로 한 시기를 날려버리는 장면을 보고 말았을 때. 곧장 2차 시기를 준비해야 하는 그는 흔들릴 시간도 없이 멘탈을 다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되려 홀로 동기화된 내가 땅굴을 파고 앉아있는 것이다. 찰나 동안 나는 이 2000년생 작은 친구의 지난 몇 년을 돌고 돌아 그가 오늘 보내야 할 밤과 앞으로의 밤, 4년 뒤 다음 올림픽을 치르는 순간까지 다녀온다.
전에 목격했던 다른 사람의 실수도 생각난다. 최근의 기억으로는 모 방송사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 생방송 무대에서 한 가수가 가사를 통째로 잊어버려 노래 중간 주저앉아버린 것이 떠오른다. 그는 놀랍게도 다시 일어나 어떻게든 노래를 이어갔지만, 동기화로 인해 이미 큰 충격을 받은 나는 그날 밤 온갖 해괴망측한 상상을 하며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 나는 실수가 정말 싫다. 실수에 취약한 내 성향은 뇌 속 어떤 회로의 작용일 테다. 학창 시절 실수로 하나둘 틀린 시험지를 눈물로 적셔 찢는 통에 동급생들로부터 힐난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의 실수와 실수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 실수를 그 단편의 실수로만 인식했다면 실수의 무게가 훨씬 가벼웠을 텐데. 나의 실수는 곧 실수하는 나였다. '괜찮아', '다음에는 잘할 거야' 같은 위로는 무용했다.
나는 실수하는 다른 사람들을 연민하며 실수했던 나와 실수하는 나를 연민했다. 위로는 할 수 없었다. 가끔은 '저 사람 어떡하지?' 걱정하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바란 것은 부디 그가 수치심과 좌절감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다. 그들이 각각 어떤 성향을 가졌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감히 상상한다. 그들도 나처럼 구질구질한 자기 비난의 강과 지난한 성찰의 늪을 거치며 사는 인간이라고.
캐리는 2차 시기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마쳤다. 준비한 것을 모두 마친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결선 진출자 8명 중 8위. 그리고 바로 다음날, 캐리는 마루운동 결선에서 금메달을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