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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Apr 15. 2022

축구선수에게 기대한 것

 많은 축구선수들을 인터뷰했지만, 2016년 K 선수와의 인터뷰는 유독 기억에 남는다. K 선수의 팀 숙소 옆 스타벅스에서 한 시간 조금 안 되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경고 방송이 맴돌았다. '비상! 비상! 노잼! 노잼!'


 이렇게 저렇게 돌리고 꼬아가며 질문을 해봐도 K 선수의 답변은 대략 "주어진 일에 최선을...", "내 자리에서 성실하게...", "현재에 집중하는...", "노력..." 등에 머물렀다. 기자들의 은어로 표현하자면, 당최 '야마'가 잡히지 않는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나 막막해하며 한숨을 내쉰 기억이 있다.


 당시의 K 선수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르며 늦깎이 국가대표로서 주목받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이제 막 주전 경쟁을 시작한 K 선수에게서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대략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기 위해 음지에서 구슬땀을 흘려온 긴 시간들'과 '마침내 꿈을 이루게 된 감동과 감격의 순간들', 그리고 '향후 국제무대로 도약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와 목표',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의지와 승부욕' 등이었다. 나의 기대는 머릿속 경고 방송과 함께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보통은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기사도 재미있고, 인터뷰가 재미없으면 기사도 재미없다. 그래서 K 선수와의 인터뷰를 기사로 옮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노잼의 늪에서 어떻게든 '야마'를 건져내 징검다리라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로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기사 작성에 쏟았다. 다행히 결과물은 예상보다 썩 마음에 들었는데, 당시에 바로 깨닫지는 못했지만 이 과정은 내게 축구선수에 대한(혹은 사람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K 선수와의 인터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2016 FIFA 파푸아뉴기니 U-20 여자월드컵 취재를 떠났다. 파푸아뉴기니, U-20, 여자월드컵. 각 단어를 떼어놓고 봐도 정말이지 대중의 관심을 받기 힘든 대회다. 하지만 KFA 소속으로 한국 U-20 여자대표팀을 동행 취재한 덕분에 나는 21명의 선수 전원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게 됐다. 2인 1실을 쓰는 선수들의 각 방에 직접 찾아가 두 명씩(독방 쓰는 한 명은 따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방터뷰'라는 꼭지 이름도 붙였다.


 대회가 열리는 파푸아뉴기니 현지에 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21명의 선수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웠다. 열여덟에서 스물을 오가는 '축구하는 여자애들'은 체형도, 머리 스타일도, 성격도, 심지어는 얼굴도 비슷비슷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21명의 선수 전원을 인터뷰하겠다는 내 아이디어는 도전 또는 객기라고도 할만했다. '파푸아뉴기니까지 왔는데! 한국 기자라고는 나 하나뿐인데! 뭐라도 해야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총 11번의 '방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는 과정은 반성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비슷비슷해 보였던 21명의 선수들은 꿈도, 고민도,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인 유일무이한 개인들이었다. '태정아!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 그 당연함을 깨닫는 데는 고작 30분의 대화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 당연함에 무얼 그리 놀라고 감동을 받았는지 나는 21명의 개인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아 기사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


 믿을 것은 과학적 증명뿐이라 생각함에도 가끔은 내가 정해진 운명 속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K 선수와의 인터뷰 없이 파푸아뉴기니에 갔더라면? K 선수와의 인터뷰만 하고 파푸아뉴기니를 가지 않았더라면? K 선수와의 인터뷰 이후 한참 지나 파푸아뉴기니에 갔더라면?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몇 명의 선수만을 인터뷰했다면? 전부 조금씩 달랐을 생각들. K 선수와의 인터뷰 직후에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21명의 선수 전원을 인터뷰했기 때문에 그때의 내가 깨달은 당연함에 대해 지금껏 곱씹고 있다.


 내가 기대한 축구선수의 이미지, 사회가 원하는 운동선수의 모델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정적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거기에는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가 가지는 특수성이 큰 몫을 차지한다. 어린 나이부터 오직 하나(축구 또는 다른 종목의 운동)만을 위해 온 시간을 바쳐 힘을 쏟아 헌신하는, 크고 확실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갖은 장애물을 통과하며 자기 자신 또는 경쟁자와 싸우는, 거기에다 국가대표라면 투철한 사명감과 애국심을 지닌 채 겸손함과 성실함도 장착해야 할 것이다. 적당한 승부욕(지나치면 안 됨)은 필수고, 축구처럼 팀 스포츠라면 깊은 동료애와 희생정신도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기 종목에서 가장 높은 레벨에 올라야 한다.


 나는 오랜 시간 그런 선수들 혹은 그렇기를 기대한 선수들에게 존경심과 측은지심을 함께 느껴왔다. 그것은 내가 축구를 좋아하고 즐기는 데 있어 큰 동력이 됐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이라도 내가 그린 이미지에서 어긋나는 선수를 질타하거나 낮춰보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지 못하거나 차마 하지 않는 것을 해내는 운동선수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뛰어난 능력과 끈질긴 노력의 결합으로 어떤 경지에 오른 선수들을 경외하면서. 사실 그들도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인데 말이다. 회사원들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싫어 퇴사를 고민하는 것처럼, 운동선수들도 훈련에 빠지고 싶은 날이나 '때려치우고 귀농을 할까?' 생각하는 날이 셀 수 없이 많을지 모른다.


 K 선수와의 인터뷰, 파푸아뉴기니에서의 '방터뷰'는 내가 선수들에 대한 '대상화'를 멈추는 출발점이 됐다. 저마다 다른 캐릭터를 지닌 선수들을 국가대표이거나 축구선수이기 전의 개개인으로 이해하는 계기였다. 목표 성취를 위해 자신을 갈아 넣지 않아도, 승부욕의 화신이 돼 동료를 질투하더라도, 당장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 즐길 줄 알아도,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고의 가치여도, 누구보다 눈에 띄고 싶어 멋을 부려도,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도. 어쩔 텐가. 개인의 삶에 다른 누가 무엇을 강요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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