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5년 6월 17일 저녁 7시. 장소는 캐나다 오타와의 랜스돈스타디움이야. (지금은 이름이 바뀐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얘기는 사실 여드레 전 몬트리올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길어지면 안 되니까 이틀 전인 2015년 6월 15일부터 시작할게. 한국여자축구국가대표팀은 2015 FIFA 캐나다 여자월드컵에서 브라질, 코스타리카, 스페인이랑 같이 E조에 속했어. 몬트리올에서 브라질이랑 코스타리카랑 경기를 하고 14일에 오타와로 이동을 했단 말이야. 그래서 15일 오후에 오타와 첫 훈련을 했는데, 장소는 오타와 알곤킨대학 축구장이었어. 훈련을 마치고 지소연을 인터뷰했거든? 그래, 지소연. 지금은 더 대단하지만 그때도 이미 대단한 선수였단 말이야. 열아홉 살에 발롱도르 후보에 오르고, 일본에서 짱 먹고, 잉글랜드에서 짱 먹고, 무튼 갓지소, 킹지소, 소연 언니... (멋있으면 다 언니...)
2015년이니까 그때 소연 언니는 스물네 살. (응, 나보다 어리셔.) 무튼 소연 언니한테도 성인 월드컵은 처음이었어. 한국이 여자월드컵 본선에 참가한 게 2003년이 처음이었고 그다음이 2015년이었거든. 그날 훈련을 지켜보는데 소연 언니가 진짜 표정이 안 좋은 거야. 계속 한숨을 쉬어. 그도 그럴 게 조별리그 1, 2차전 결과가 안 좋았거든. 브라질한테는 0-2로 지고, 코스타리카랑은 2-2로 비겼어. 그것도 경기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먹었지. 마지막 3차전에서 스페인을 이겨야만 목표로 한 16강 진출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야. 비기는 것도 안돼. 절벽 끝인 거지.
훈련이 끝나고 인터뷰하려고 잔디에 앉았는데 지소연의 다리를 보니까 여기저기 멍들고 긁히고 난리야. 그것보다 마음이 짠한 건 표정이야. 잔디를 만지작 거리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데, 안쓰러워서 말도 못 해. 원래 굉장히 밝고 씩씩한 캐릭터였는데 말이야. 에이스라는 자리가 주는 부담감이 장난이 아닌 거지. 이틀 뒤 스페인이랑 하는 3차전 각오를 물어보니까 외려 "잘할 수 있겠죠?" 하면서 되물어. 내가 눈물이 나요, 안 나요? 나 눈물 참으려고 하늘 봤다.
그렇게 이틀 뒤가 됐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왜 비장해? 나 이렇게 내 첫 해외 출장을 끝낼 수 없다. 스페인 잡고 다시 몬트리올 간다! (16강전은 몬트리올에서 열리거든.) 일찌감치 경기장 도착해서 기사 쓸 준비 하는데 나 너무 떨려. 너무 긴장돼. 캐나다 6월 날씨 얼마나 좋게요? 근데 10초에 한 번씩 소름이 끼치더라니까.
7시 됐어. 경기 시작이야. 기자석은 관중석 꼭대기 중에서도 꼭대기에 있었는데 시야는 제법 좋았어. 그리 크지 않은 예쁜 경기장이었는데 2만 명 넘는 관중이 자리를 거의 다 메우고 있었지. 전반전은 솔직히 착잡했어. 경기가 영 안 풀리는 느낌이었고 실점까지 했어. 대회 전부터 요주의 선수로 손꼽히던 베로니카 보케테한테 전반 29분에 골을 내준 거야. 그러고 나서도 계속 밀리다가 전반전이 끝났는데, 하프타임 동안 너무 괴롭고 스트레스받아서 울고 싶었어. (알아, 과몰입이야.)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됐는데! 락커룸에서 뭘 하고 왔는지, 이 언니들이 완전히 달라진 거야. 점점 스페인을 골문 쪽으로 밀기 시작하더니 코너킥 기회도 계속 잡고, 무튼 전반전이랑 양상이 확 달라졌어. 그러더니 후반 8분 동점골을 넣어! 지소연의 전진 패스, 강유미의 침투와 크로스, 조소현의 헤더로 이어지는 완벽한 골! 나는 기자석인 걸 망각하고 왁!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어.
1-1이 되니까 경기는 훨씬 치열해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라. 그리고 후반 33분! 후반전 시작 때 교체 출전한 풀백 김수연이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길게 찼는데, 이게 그대로 스페인의 골문에 빨려 들어갔어! 으악! 내가 기자야, 뭐야, 알게 뭐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두 주먹을 번쩍 들었어! 믿기지 않는 슛터링(슛+센터링) 역전골에 한국 선수들, 스태프들, 관중 다 광란의 도가니였지.
2-1로 앞서고 있으니까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몰라. 이제 경기 종료까지 10여분 남았잖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센터백 심서연의 목소리가 들려. "10분 남았어, 10분! 집중하자!" 관중석 꼭대기까지 말이야. 아주 또렷하게. 이제 급한 쪽은 스페인이야. 스페인은 다시 동점을 만들려고 계속 공격을 펼쳐. 한국 선수들은 그걸 눈에 불을 켜고 막지.
그리고 추가시간. 3분 중에 3분이 거의 다할 무렵이야. 스페인이 페널티에어리어 아크 근처에서 프리킥을 얻어내. 센터백 황보람이 넘어지면서 공을 손으로 건드린 거야. 와. 코스타리카전 악몽이 막 머릿속을 지나가. 내 심박수 200. 안돼! 사상 첫 월드컵 첫 승, 사상 첫 16강 진출, 다 왔어, 다 왔단 말이야! 눈앞에서 물거품이 될 수는 없어!
삑! 프리킥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 탕! 소니아 베르무데스의 슈팅이 골대를 맞히는 소리. 삑, 삑, 삐익!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 소리. 분명 몇 초에 불과했을 그 장면이 지금도 슬로모션처럼 기억이 나. 사상 첫 월드컵 첫 승, 사상 첫 16강 진출! 선수들이 얼싸안고 우는 걸 보면서 나도 같이 벅차올랐지. 언니들... 잠깐이나마 못 믿었던 걸 반성합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 나 일해야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둘러 믹스드 존으로 내려갔어. 선수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가장 먼저 지소연이 보였어. 이날 경기의 MVP로 뽑혀서 진행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기자회견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지. 나는 선수 통로를 구분하는 펜스 바깥에 있었고, 지소연은 선수 통로보다 더 안쪽에 있는 검은색 커튼으로 가려진 또 다른 통로에 있었는데, 커튼 사이로 날 봤나 봐. 커튼을 휙 걷고 얼굴을 쏙 내밀더니,
"언니! 언니! 우리 16강 진출했어요! 어떡해! 너무 극적이야! 으악!"
땀에 흠뻑 젖어서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안광을 빛내며 나를 '언니'라 부르던 소연 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죽을 때까지 기억할 거야. 내가 그때 어떻게 화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같이 "으악!" 하면서 손을 흔들었던 것 같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순간을 함께 했는데 말이야. 한국의 여자축구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오타와의 기적'을. "우리가 잘하면 여자축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질 거예요.", "우리가 잘하면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 어린이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마음을 움직이는 축구를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울고, 웃고, 땀 흘리고, 환호하던 여자들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