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정 Aug 27. 2022

실업급여 수급을 포기했다

돈의 날

 백수가 된다는 것은 돈 대신 시간을 얻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간을 얻고 돈을 잃는 것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다달이 들어오는 돈이 있다 없어지니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백수가 되기로 결심할 시점에는 실업급여 수급이라는 전제가 있었지만, 그것이 사라지니 나는 정말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고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만 있는 생활을 하게 됐다.


 실업급여 수급을 포기한 이유는 첫째로 회사와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고(할많하않), 둘째로 질병에 의한 퇴사로 수급 신청을 하려 했으나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을 가지고 간 내게 고용센터 직원이 한 말을 대략 요약하자면 ‘그 정도 아프신 걸론 안 봐드려요’였다. 뒤에 “안 봐드려요”는 실제로 들은 말이다. 뭘 봐주고, 뭘 안 봐준다는 것인지. 저 8년 넘게 꾸준히 고용보험료 냈는데요.


 아무튼 그래서 실업급여 수급을 포기했다. 더 씨름할 여력은 없고, 더 씨름하지 않아도 될 여유는 있다. 당장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나보다는 그 돈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겠지. 그렇게 위안하면서… 맞다. 나는 실업급여가 꼭, 꼬옥, 꼬오옥 필요한 사람은 아니다. 부양해야 할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두 분 다 연금 수급자다.) 먹여 살릴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 하나 잘 보살피면 되는 사람이다. 8년 넘게 일했으니 돈도 꽤 모이지 않았나. (티끌 모아 ㅌ… 동산!) 물론 대부분은 전세 보증금으로 들어가 있지만 말이다.


 돈을 ‘모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가계부를 쓰거나 지출 내역을 정리한 적이 없다. 한동안은 월급이 언제 얼마나 들어오는지 확인을 못한 채로도 잘 살았다. 돈은 그냥 ‘모였다’. 딱히 돈이 새는 타입이 아니라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용돈이나 세뱃돈을 쟁여두기는 했지만 그 돈으로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갖고 싶은 물건이 별로 없기도 했고, (아마도 꼭 필요한 것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미리 공급을 받았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냥 돈이 모여있는 것을 보는 게 좋기도 했다. 그렇다고 구두쇠까지는 아니지만, 지방 소도시의 공무원 가정에서 자란 여자애가 가진 합리적인 소비의 기준은 지금 사는 서울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꽤나 소박했던 것 같다.


 헛된 소비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가장 후회되는 소비는 20대 초중반에 ‘꾸밈’을 하느라 들였던 돈이다. 당시는 한창 인터넷 보세 쇼핑몰들이 성황을 이루고 SPA 브랜드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던 때였다. 싸고 질 낮은 사탕 껍질 같은 여성복들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저렴한 색조 화장품을 파는 소위 로드샵들도 말 그대로 거리에 줄지어 깔려있었다. 길을 걷다가 로드샵이 보이면 습관적으로 들어가서 요상한 이름의 아이섀도나 립스틱을 한두 개씩 사들고 나오고, 집에 가서는 즐겨찾기 해놓은 인터넷 쇼핑몰들을 차례로 탐방하는 게 하루 루틴일 정도로 ‘꾸밈 소비’에 진심이던 때가 있었다. ‘꾸밈’에서 해방된 지금 돌이켜 보면 한 푼이 아깝지만, (그 돈을 안 썼으면 지금 당장 식기세척기와 의류관리기를 샀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것보다, 그때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고 위안해본다.


 어찌 됐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고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만 있는 생활에서는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내 월간 고정 지출인 보험료, 아파트 관리비, 공과금, TV와 인터넷을 포함한 통신비, 구독 서비스(OTT, 생리대, 채소 박스), 기부금 등을 합하면 3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백수가 되면서 휴대폰 요금제를 한 단계 낮춰 5천 원 정도를 세이브했는데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OTT 시대에 더 이상 잘 보지 않게 된 TV를 없애면 1만5천~2만 원 정도를 아낄 수 있을 것 같지만, TV라는 것은 없으면 아쉬운 존재가 아닐까 싶어 고민 중이다. 기부금 중에 제일 큰 부분은 말리에 있는 열세 살 소녀에게 보내는 후원금인데, 내가 백수가 되겠다고 한 소녀의 학업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잊고 있던 휴면 계좌의 42만5천3백 원이 너무나 소중하다. 얼른 통장을 해지하고 모바일뱅킹이 가능한 다른 계좌에 돈을 넣었다. 뿌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P형 인간의 계획 세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