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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Jul 04. 2022

P형 인간의 계획 세우기

계획의 날

 백수가 돼 계획을 세우려니 떠오른 것은 초등학생 때 방학을 맞아 만들던 생활계획표다. A4용지에 컴퍼스로 큰 원을 그리고 24시간을 나타내는 눈금을 그린 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문제집을 풀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피아노를 치고 하는 등을 적어 넣는 것이다. 정해놓은 활동마다 알록달록 색칠까지 해서 상단에 ‘태정이의 여름방학 생활계획표’ 따위를 적어 넣고 책상 유리 밑에 끼워 넣으면 본격적인 방학이 시작된다. 어려서부터 인정 욕구가 남달랐던 나는 분단위, 초단위로 시간을 지켜가며 착실히 생활계획표를 실천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완수하면 잠들기 전 마지막 활동인 일기 쓰기 시간에 ‘오늘도 보람 있는 하루였다’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의 삶에서는 세상의 복잡함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일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서 오는 성취감을 제법 배웠던 것도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체득한 것은 보류, 연기, 유예 같은 개념이다. 세상 모든 것이  통제 안에 들어올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고, 융통성이나 즉흥성에  가치를 두게 됐다. 본래의 성격인지 그렇게 성장한 것인지 확실히 나눌 수는 없지만 어찌 됐건 나는 계획성과는 거리가  어른으로 자랐다. 얼핏 계획성처럼 보이는 부분은 인정 욕구에서  강박증에 가깝다. 그것을 깨닫고  뒤로는 의도적으로도 더더욱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대단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무계획도 계획이라고, 더 이상 쫓기는 바가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여유롭게 편안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하지만 ‘백수되고 갓생살기’라는 제목이 쑥스럽지 않을 정도는 돼야겠다 싶었다. 물론 ‘갓생’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 ‘갓생’의 기준은 좀 관대한 편이다. 그럼에도 계획이라 당당히 적고 보니 영 민망스러워 규칙이라 바꿔 적어 본다. 적고 보니 ‘갓생’의 규칙이 아니라 ‘생존’의 규칙이다.


 생존. 죽지 않고 살아있음. 이마저도 버거울 때가 있었다. 아니, 있다. 한창(?) 기력이 없을 때를 생각하면 계획이든 규칙이든 무얼 세우  자체가 사치다. ‘오늘은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만으로  자신을 대견하다 치켜세워야만 겨우 생존의 에너지를 축적하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대강이나마 삶의 규칙을 세울 만한 기력은 있다. 그래서 나는  규칙들을 기초로 해서 ‘혼자 사는 여성의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계획 중이다. 혼자 사는 여성의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 그야말로 ‘갓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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