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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Sep 27. 2022

나의 치석 같은 우울, 우울 같은 치석

스케일링의 날

 미루고 미뤘던 치과 진료를 받았다. 시간이 안 나 못 간다는 변명은 백수가 되니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오랜만에 치과 냄새를 맡으며 대기실에 앉아 있자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치과에서는 거짓말이 안 통한다. 의사 선생님은 내 구강 상태를 보기만 해도 내 치과 진료의 역사는 물론 양치 습관도 알아챌 것이다. 하기는 치과 의자에 눕혀져 입을 벌리는 순간부터는 변명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얼굴 정면에서 내리쬐는 조명 때문에 눈을 감아도 밝게 느껴진다. 스케일링의 시작을 알리는 기분 나쁠 만큼 높은 기계음이 들리면 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최대한 힘을 빼려고 노력하면서 코로 밭은 숨을 쉬다 보면 은은한 물 냄새와 피 냄새가 난다. 지금 내 볼에 튄 액체는 물이겠지? 피는 아니겠지? 배꼽 위에 모은 두 손이 자동으로 공손해진다. 이런 나에 비해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 여유롭다.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프지만 시원하시죠?” 오잉, 이건 내가 심리상담 때 했던 말 같은데. “오랫동안 서서히 쌓인 거라 적응이 돼버려서 불편한지도 모르고 지내셨을 거예요.” 아, 이건 정신건강의학과 첫 진료 때 들었던 말이랑 비슷한데. 그런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나의 우울은 그것이 만성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랫동안 모른 척하고 방치해둔 탓에 그것이 성격처럼 굳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 우울하고 나른한 상태가 디폴트인 사람. 우울이 당연한 사람. 우울이 정체성의 일부가 돼버린 사람. 그래서인지 나를 끝없이 가라앉히는 그것이 결국 나를 질식시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발버둥 치다가 지쳐 가라앉고, 다시 발버둥 치다가 포기해 다시 가라앉고… 결국 숨통이 트인 순간은 내 진실한 상태를 깨닫고 인정했을 때였다. 살을 찢어 아가미를 냈달까? 그래서 심리상담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다. “아픈데 시원해요.”


 혹자는 우울이 당뇨나 고혈압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치석 같은 것이라고 해도 말이 된다. 평생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전문가의 도움을 적극 받아야 한다는 점도 그렇다. 평소에 아무리 열심히 양치를 하더라도 건강한 치아와 잇몸을 위해서는 스케일링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우울 또한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면서 적절한 상담과 복약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보다는 관리가 핵심인 셈이다. 우울이 숙명이라면 좀 슬프지만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영원한 동반자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스케일링이 끝났다. 몇 년 전 사랑니를 뺄 때는 시술을 받는 동안 ‘사랑니는 왜 나서 사람을 괴롭히는가, 사랑니는 상처받은 의지들의 표상이 아닐까’하며 (당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상념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치과 의자에는 사실 사람을 관념적으로 만드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결 상쾌한 구강 상태를 갖고 나니 관리 의욕이 한껏 올라갔다. 치간칫솔도 새로 구비하고 안 쓰던 구강세정기까지 샀다. 미루다 간 치과에서 얻은 상념이야 개인적인 것이지만 모든 현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이것이다. 갓생의 첫 단계는 스케일링이다. 구강에도, 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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