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OOO 연구팀, 세계 최초 XXX 치료제 개발”
“부작용 없고 모든 암에 적용 가능한
`만능 암 치료법` 나왔다”
작년 초 여러 주요 일간지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내 생각은 이내 ‘역시나’ 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해당 기술은 획기적인 기술이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암환자에게 쓸 수 있는 “치료법”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OOO 연구팀, 세계 최초 XXX 치료제 개발”
사실 이런 식의 기사들은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가족 중의 누군가가 해당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아마 이런 기사를 볼 때 가슴이 쿵쾅거릴 겁니다. ‘혹시라도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기대 때문에요. 당연합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제 겨우 세포 실험단계 혹은 동물실험 단계에서 가능성을 보였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해당 기술이 약으로 개발될 확률은 아직 매우 낮으며 (1% 미만), 그리고 시간도 적어도 7년에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제가 희귀 난치질환 환자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환자 가족분들은 저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곧 치료제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가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곤 했습니다. 신약개발을 위한 도전은 멈추지 않아야겠지만, 연구결과를 마치 당장 치료제가 나오는 것처럼 부풀리거나 읽는 사람이 오해하기 쉽도록 만드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약은 인류의 건강과 수명을 향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UN 통계에 따르면 지난 70년간 인류의 수명은 23년 정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2020년에 나온 한 보고서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데에는 신약의 개발이 기여한 바가 약 35% 정도 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공중보건의 개선과 더불어서 신약이 인간수명의 연장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치료법이 없어 죽어야만 했던 많은 질병들이 현대에는 약으로 인해 치료 내지 관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여러 가지 감염질환이나 당뇨, 고혈압, 그리고 AIDS 같은 병들이 대표적입니다. 아직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암이나 치매와 같은 질환에서도 계속해서 조금씩 더 나은 치료법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소식은 생명과학기술이 1990년대 이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 지금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고 많은 새로운 치료법들의 개발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1990년은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라는 역사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던 해입니다. 이 연구 덕분에 인간의 유전정보 전체를 해독한 유전자지도가 완성되었고 이를 계기로 인체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증가했던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 인간의 유전자지도를 만드는데 수천 명의 과학자가 달라붙어서 꼬박 13년에 걸쳐 3조 원 이상의 연구비를 써야 했던 것에 비해, 지금의 기술로는 똑같은 일을 단 몇 시간 만에 단돈 몇십만 원의 비용으로 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속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해 보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하지만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전히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예컨대 연구실에서 대단한 효능이 있어 보이는 물질을 발견 혹은 발명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로 먹이거나 주사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그리고 심각한 부작용은 없는지 등을 확인하기 전에는요. 그래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매우 꼼꼼하게 여러 단계의 연구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사람에게 시험해 보기 전에 실험실에서 약의 안전성과 효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비임상시험(non-clinical study)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만도 보통 몇 년은 걸립니다. 비임상 시험을 통해 약이 효과도 있고, 안전할 것 같다는 증거가 충분히 확보되면 비로소 실제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clinical study)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임상시험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한국의 식약처나 미국의 FDA 같은 규제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소수의 건강한 성인만을 대상으로 적은 양부터 시작해서 점차 약의 용량을 늘려가며 약이 혹시나 몸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는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이것을 임상 1상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소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약효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양을 투여해 보고 약이 안전한지, 효과가 있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이것을 임상 2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게 되면 비로소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확대해서 약의 안전성과 효과를 최종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임상 3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각각의 단계를 밟아 나가는데 짧게는 약 5-6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도 탈락할 확률이 90%가 넘습니다.
이전 글에서 제가 신약개발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산업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드린 것처럼 매우 긴 인고의 세월을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약 하나를 개발하는데 평균적으로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합니다. 참고로 새로운 자동차 모델 하나 개발하는 데는 콘셉트에서 출시까지 보통 3년 정도 걸린다고 하고, 새로운 전자제품은 18개월 정도, 그리고 일반 소비재 제품의 경우에는 12개월 정도의 연구개발기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10년은 그에 비하면 너무 긴 세월입니다.
한국에 아직 글로벌 수준의 제약기업이 없는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의 기업들은 이렇게 긴 연구개발기간을 필요로 하는 산업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단적인 예로 제가 약대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당시에 그나마 신약개발에 도전했던 회사들은 SK, LG, CJ 정도였습니다. (대기업이 아닌 한국의 제약회사들은 당시에 신약이 아니라 주로 복제약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 둘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운 좋게 LG와 CJ 두 군데에 합격한 후 최종적으로 CJ에 입사하여 연구원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후에 CJ와 LG는 둘 다 신약개발에서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CJ의 경우 설탕, 햇반 같은 식품사업이 주력이었고 그 외에도 엔터테인먼트, 물류 등의 산업을 아우르고 있었는데 투자대비 성과가 비교적 바로바로 나오는 이들 산업군과 달리 신약개발사업은 결과를 보기까지 너무나 오래 걸리고 또 성공도 장담할 수 없는 사업이다 보니 아마 최고경영진에서는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LG도 비슷했던 것 같고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 두 회사에서 신약개발 연구를 하던 많은 분들이 회사를 나온 후에 창업을 하거나 다른 회사들로 옮겨서 연구를 계속해 온 덕분에 한국의 신약개발의 토대가 그나마 지금의 수준 정도에라도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LG와 CJ는 신약개발사업을 접었다가 그 이후에 다시 이 분야 재도전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두 회사가 이전의 행보를 반복하지 않고 성과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부디 인내심을 갖고 전력투구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 제가 개발비용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남겨두었습니다.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은 다음 글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줄 요약>
- 약은 인간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되는 데에 공중보건의 개선과 더불어서 가장 큰 기여를 했다.
-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것은 1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다.
- 새로운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까다로운 연구를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서 90% 이상의 후보물질이 탈락한다.
<Reference>
World Population Prospects | United Nations (2023)
Contributions of public health, pharmaceuticals, and other medical care to US life expectancy changes, 1990-2015 | Health Affairs (2020)
Innovation in the pharmaceutical industry: New estimates of R&D costs | DiMasi JA et al. (2016).
Building an R&D strategy for modern times | McKinsey (2017)
Accelerating Product Development in Electronics | Accenture (2018)
Breakthrough Innovation Report Europe Edition | Nielsen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