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Aug 13. 2023

‘심신미약’은 누구의 책임인가? (안압상승 주의)

2023년 8월 13일 (일요일), 흐림

“당분간 절대로 눈을 비비면 안 됩니다. 잘 때 눈에 이것을 붙이고 주무세요.”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눈 수술을 했다. 주된 이유는 망막의 문제 때문이었지만 하는 김에 백내장과 비문증 등등 여러 가지 증세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로 했다. 눈알에 구멍을 세 개씩이나 뚫고 하는 수술이라기에 무서웠는데 다행히 노련한 의사 선생님 덕분에 수술은 잘 된 모양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잘 때 쓰라고 눈보호대를 받았다.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고 가장자리는 피부에 접착되는 부드러운 부직포가 붙어있었다. 막상 사용해 보니 눈이 꼭 팬더곰 같이 된다.


사실 수술을 마친 내 눈은 흡혈귀처럼 시뻘겋기에 굳이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감히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일부러 눈에 손을 댈리는 만무한데 굳이 이런 걸 눈에 붙이고 자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키는 건 또 곧잘 하는 체질인지라 일단 잠들기 전에 한쪽 눈에 보호대를 붙이고 누웠다.


밤에 잠을 뒤척이다가 살풋 깨었다. 내 손가락이 플라스틱 눈보호대에 탁탁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잠을 깬 것이다. 아마 자다가 눈이 가려워서 손으로 눈을 비비려 했던 모양이다. ‘이런... 보호대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생각해 보니 갓난아기의 손을 배냇저고리나 아기손싸개로 씌우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기들이 손톱으로 자기 얼굴에 상처를 낼 수 있다. 어디 갓난쟁이 아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나. 자기 손이 손인지 발인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르고 휘적휘적거리다가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눈 보호대도 그렇고 배냇저고리도 그렇고, 혹시라도 내 뜻과 무관하게 생길지도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고 이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문득 기업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하는 일들이 간혹 벌어진다. 그래서 회사는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사결정 및 승인절차를 세밀하게 설계해서,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아예 구조적으로 미연에 방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내부통제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내부통제시스템의 구축은 사실 모든 기업에 필요한 것이지만 특히 우리처럼 상장을 준비하는 회사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요건이기도 하다.


물론 내부통제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고 능사는 아니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는 수십, 수백, 수천억원대 횡령사고 같은 일들은 내로라하는 큰 기업들에서 벌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회사들에도 당연히 내부통제시스템은 이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고가 터졌다는 것은 그 회사의 내부통제시스템에 결함이 있었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회사는 추가조치의 일환으로 내부통제시스템을 더욱 보완하고 강화해야만 한다.




사람은 불완전하고 100% 믿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불완전한 사람이 사고 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들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본인이 온당히 할 수 있고 또 했어야 할 조치들을 책임 있게 다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나중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 옳다. ‘아차, 내가 방지조치 하는 걸 깜빡했었네‘ 라고 하면서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요즘 범죄사고 관련 뉴스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심신 미약’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왜 자기가 술먹고 취해서 사고를 쳤는데 죄를 경감해 주고,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치료를 거부하다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는데 범죄가 더 가벼워진단 말인가. 오히려 술을 마신 책임을 지워서 죄를 더 크게 묻고, 치료를 거부한 것에 대해 가중처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심신 미약’이란 것을 참작해야 할 경우들이 일절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했을 수 있고 또 했어야 할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책무유기’를 ‘심신 미약’이라는 단어로 바꿔치기하는 듯한 요즘의 세태가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수술 후에 한동안 중요한 것이 눈을 절대 비비지 않는 것과 안압이 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갑자기 혈압과 함께 안압이 솟구치는 느낌이다. 내 눈 건강을 위해서 이쯤에서 펜을 놓아야겠다. 휴우~~

매거진의 이전글 ‘근로자(노동자)’의 반대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