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일 (월요일), 맑음
오늘도 싱가포르에 있는 아들과 화상통화를 했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이제는 아빠가 놀아달라고 보채는 것이 귀찮을 법도 한데, 그래도 아직 웬만하면 전화도 잘 받아주고 시간 날 때는 체스나 포켓볼 같은 게임도 온라인으로 같이 해 준다. 그렇다. 이제는 내가 아들한테 놀아달라고 보챈다. 옛날이랑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정말 착하고 고마운 아들이다.
"서준아, 내일 학교 갈 준비는 다 했어?"
"내일 학교 안 가요."
"왜?"
"Labour Day (노동절)"
"잉? 그래??? 너는 일하지도 않잖아? 그런데 네가 왜 Labor Day에 쉬는 거야?"
"저도 일해요. Homework(숙제=집에서 하는 일)"
"헐..."
아들 덕분에 싱가포르는 5월 1일이 법정공휴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도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라서 우리 회사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회사가 휴무인 것으로 알지만, 그렇다고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공휴일은 아닌지라 갑자기 한국도 5월 1일에 학생들이 학교에 안 가는지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에서 5월 1일은 싱가포르와는 달리 ‘법정공휴일’은 아니다. 대신 근로기준법에 따른 ‘유급휴일’이란다. 흠... 그러니까... 이게 뭔 소리여??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은 그 지위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라 '국가공무원복무규정'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근로자의 날에도 근무를 해야 한단다. 정리하자면 ‘근로자의 날’은 법정공휴일은 아니고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들이 ‘유급휴일’을 인정받아 쉴 수 있는 날이므로, 법적으로 ‘근로자’가 아닌 사람들은 근무를 해야 하고 여기에는 선생님들도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학생들은 5월 1일에도 등교해야 한다.
그나저나 선생님을 포함한 공무원들은 근로자가 아니라니 좀 이상한 느낌적인 느낌이다. 그들도 엄연히 노동을 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인데 말이지... 그럼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란 과연 누구일까?
사실 한때 이 문제 때문에 나도 심각하게 속을 썩인 적이 있다. 이전 회사에서 나올 때였다. 당시 다국적 기업의 한국지사 대표로 일하다가 본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함께 일하던 많은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종의 퇴직위로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 위로금의 성격을 퇴직소득으로 볼 것이냐 근로소득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적용되는 세율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은 바로 위로금을 받는 사람이 근로자인가 아닌가의 여부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직원들은 근로자였기에 그들에게 지급되는 퇴직위로금은 퇴직소득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무척 낮은 세율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내가 법적으로 ‘근로자’가 아니며 따라서 퇴직위로금을 퇴직소득이 아닌 근로소득으로 간주하여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근로소득세율을 적용한다고 하였다. 당혹스러웠다.
”아니, 내가 근로자가 아니라고? 왜???
그리고 근로자가 아니라면서 근로소득세를 내는 건 또 뭐야? “
걸려있는 금액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꼬치꼬치 따져야 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예컨대 근로계약서가 있어야 하고, 근로의 대가로 임금을 받으며, 상사의 지휘 감독하에 업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며,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있는 것 등등. 나는 이 모든 조건들이 나에게도 정확히 해당되었기 때문에 내가 근로자가 아니라는 논리를 더더욱 수긍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무엇이라고 믿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근로자’가 아니었다.
그럼 나는 뭐였단 말인가? 근로자의 반대말이 뭐지? 일을 하는 근로자가 아니라면 백수란 말인가? 아니면 계급이론 관점에서 노동자(프롤레타리아, proletarier)와 달리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인 자본가(부르주아, bourgeois)? 둘 다 아닌데...
근로기준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근로자’의 범위는 무척이나 좁아진다. 백수도 제외되고, 자본가도 제외되고, ‘사용자’라 불리는 기업의 경영자들도 제외된다. 선생님을 포함한 공무원도 제외되고, 3만 명에 육박하는 전국의 치킨집 사장님 포함하여 모든 자영업자도 제외된다. 근로자가 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다 ㅎㅎㅎ.
요즘 ’행복한 경영‘에 대해 공부하는 기업대표들의 모임을 알게 되어 정기적으로 나가고 있는데, 여기서 만난 대표님들은 그 누구도 법적으로 ‘근로자‘는 아니지만 ’일‘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 만큼은 프로 중의 프로 들이다. 문자 그대로 ’주인의식‘으로 똘똘 뭉쳐 일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근로자’가 아닌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들도 비슷할 것이다.
법적 지위가 ‘근로자’ 이건 아니건 일부 진짜 자본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노동)하고 그 댓가로 생계를 이어간다. 노동절 혹은 근로자의 날이 법정 근로자만이 아니라 그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