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그리닝 (Evergreening)
<1999년 6월 2일>
"화장실에 갈 사이도 없을 만큼 바빴다. 내일은 최종분석을 하느라 하루가 갈 것 같고 모레 있을 EPO PK 실험을 위한 준비도 해 두어야 한다. 비드 용출실험 시료를 분석해야 하고 특허도 써야 한다."
연구소 막내였던 초보 신입사원 시절을 지나면서 주어지는 일들도 점점 많고 다양해졌었다. 하루 종일 이 실험 저 실험에 투입되어 바빴지만 그 와중에 잠시 짬이 날 때마다 특허도 써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대학원 다닐 때는 주로 논문을 작성했다면, 회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주로 특허를 작성했다. 제약회사의 입장에서는 논문보다 특허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허권은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에게는 생사여탈권과도 같다. 특허로 무장한 똘똘한 신약은 잘만 하면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반면, 특허보호 기간이 만료되는 순간 엄청난 매출이 순식간에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어서이다.
"칼바람 글로벌제약사…'감원·구조조정' 지속"
"세계최대 제약사 P사 구조조정 본격화"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이런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잘 나가던 회사들이 왜?' 하고 내용을 들여다보면 열에 아홉은 팔고 있던 약의 특허가 만료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매출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데 다른 후속제품이 그 공백을 메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줄어드는 매출에 비례해서 비용을 줄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대응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일라이 릴리 (Eli Lilly) 역시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다. 회사의 주요 품목들의 특허권이 몇 년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만료되면서 회사가 크게 휘청였었다. 그때를 전후해서 나와 나의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원조 신약에 비해서 복제약은 같은 성분임에도 훨씬 낮은 가격에 판매된다. 그래서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경제적으로 이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약을 개발해서 높은 가격에 판매했던 회사를 욕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약이 있으니 복제약도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신약개발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복제약은 커녕 소중한 신약은 아예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이 복제약보다 비싼 이유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는 수조원대의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특허는 회사가 그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독점판매 기간을 부여한다. 보통 특허로 인한 독점기간은 20년이지만 신약의 경우에는 그중 10년 이상을 약을 개발하느라 써버리기 때문에 막상 약을 독점적으로 팔 수 있는 기간은 몇 년 정도밖에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특허권을 너무 오랜 기간 부여하면 소비자가 비싼 약값을 오랜 기간 동안 지불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반면, 그 기간이 너무 짧아지면 신약개발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신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손해다. 통계에 따르면 인류의 평균 수명이 증가한 데에는 신약이 기여한 바가 절대적으로 크다. 결국 특허라는 제도는 양날이 있는 검과 같다. 조심해서 잘 써야 한다.
1.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 인생에도 특허를 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특허를 낼 기본 자질은 다들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특허는 단순히 '다르다'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허를 심사할 때는, '다름' 혹은 '새로움'도 중요하지만 누구도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다름'의 정도가, 누구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진정한 고민의 산물이어야만 특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남들의 생각에만 이끌리는 것은 우리의 가치를 높여주지 않는다. “If you have a yes-man working for you, one of you is redundant. (매사에 '예'라고만 하는 사람이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다면, 당신 두 사람 중 한 명은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독창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고 남들과 다른 모습, 다른 생각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시대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관찰해서 자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모습을 잘 알아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보호하고 키우는 자세가 중요하다.
2.
특허에서는 ‘선점’이 중요하다. '전화기' 하면 우리는 으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을 발명자로 떠올린다. 하지만 그가 '전화기 발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가 '엘리샤 그레이 (Elisha Gray)'라는 당대의 다른 유명 과학자보다 전화기 특허를 단지 2시간 더 일찍 출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먼저 기술을 발표하거나 특허출원하게 되면 후발주자의 발명은 '신규성'을 인정받지 못해서 특허등록이 거절되는 것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가끔 있다. 회의나 행사 중에 어떤 좋은 질문이나 발언할 내용이 생각났는데 막상 손을 들지 못하고 망설일 때다. 중요한 자리이거나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될수록 주저하게 되고 심장은 콩닥거린다. 그러고 있는 사이, 다른 누군가가 내가 하려던 말을 해버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와~" 하며 찬사를 받는다. 속으로 '사실은 내가 먼저 생각한 건데'라고 억울해 하지만 아무 소용없다.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아무런 좋은 질문이나 발언도 하지 못한,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사람일 뿐이다. MBA 유학시절에 내가 많이 겪었던 일이다.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기회는 사라질 수도 있다.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3.
특허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고 나면 누구든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특허가 만료되기 전에 소위 '에버그리닝 (Evergreening)'이라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한 가지 특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관련된 기술들을 개발하면서 추가적인 특허를 연속적으로 출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더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단 한 번의 기회가 영원히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기에 한때 얻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방법을 통해 나 자신을 계속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 계속해서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많이 회자되는 'N잡러'와 '부캐'와 같은 용어들은 현대인들이 한 가지 정체성이나 직업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와 경쟁력을 키워가는 일종의 ‘개인별 에버그리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을 넘어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 업그레이드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원본이다. 남들과 절대 똑같을 수 없는 그 특별함은 이미 특허감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특허받을 자격이 있다. 이왕에 나만의 ‘특허’를 가졌다면 그것을 더욱 잘 가꾸고, 소중하게 아끼며, 당당하게 지켜나갈 일이다.
(202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