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Aug 22. 2024

안정된 직장이 마냥 안전하지 않을 때

Stability (안정성) & Safety (안전성)

<1998년 1월 13일>

"요즘 주로 CFC-222 주사제 개발을 위한 실험을 전담하고 있다. 우선 DDW 수용액을 만들어 농도별, lot별, 온도별 안정성을 보고 있다. 내일부터는 isotonic solution을 만들고 빛 등에 대한 안정성을 보아야 할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취업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왕이면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었다. 마침 그때는 IMF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회사는 망할 일이 없겠지'라는 생각에 크게 안도하면서 안전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들었다.


첫 직장에서 말단 연구원으로서 했던 일 중에 하나는 당시에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던 약의 '안정성'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럴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아주 기초적이면서 무척 단순한 업무였다.



안정성


음식에 유효기간이 있듯이 약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차츰 변질되는 것처럼 약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성분이 점점 분해되거나 다른 성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약의 '안정성'이란, 약이 변하지 않고 원래 상태를 얼마나 잘 유지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아무리 효과가 뛰어난 약이라 해도 안정성이 낮으면 좋은 약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제약회사에서는 약을 개발할 때 안정성을 꼼꼼하게 검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놓아두면서 약의 원래 성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살핀다. 일반적인 실온에서 뿐만 아니라 무척 높은 온도에서도 살펴보고 습도가 높거나 빛이 많이 쪼이는 등의 혹독한 조건에서도 살펴본다. 그리고 약효는 너무 좋은데 안정성이 떨어지는 성분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잘 알게 된 코로나 백신, 그중에서도 모더나화이자 같은 제약회사가 만든 mRNA 백신이다. mRNA는 효과가 뛰어나지만 안정성이 극도로 낮은 물질이다. 가만 놔두면 금방 분해되어 버리기 때문에 예전에는 차마 약으로 개발할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질나노입자 (LNP, Lipid Nanoparticles)’라는 기술이 개발되어 mRNA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특수한 기름 알갱이들로 mRNA를 감싸서 잘 분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기술이다. 그 덕분에 비로소 mRNA가 약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



안전성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안정성'과 종종 혼동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으로 '안전성'이 있다. '안전성'은 말 그대로 약이 우리 몸에 투여되었을 때 얼마나 '안전한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약이란 원래 우리 몸의 이상을 치료해서 건강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 쓰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부작용 혹은 유해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약을 개발할 때는 그 약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약이 얼마나 안전한지도 대단히 중요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같은 보건당국은 새로 개발된 약에 대해 판매허가를 내어줄지 말지를 결정할 때 신약의 ‘안전성’이 충분한지를 꼼꼼하게 따진다. 적어도 약으로 인해 입을 수 있는 해로움보다 약이 줄 수 있는 이로움이 훨씬 더 크다라고 인정되어야 정식으로 허가받을 수 있다.




‘안정성’과 ‘안전성’. 영어로는 ‘Stability’와 ‘Safety’. 이 두 단어는 명백히 다른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종종 혼동되어 잘못 쓰이는 것을 보곤 한다.


일반인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간혹 의약학 관련 기사에서조차 ‘안전성’을 ‘안정성’으로, ‘안정성’을 ‘안전성’으로 잘못 표기하는 것을 볼 때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쯧쯧쯧 혀를 차곤 한다. 나의 일종의 직업병인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정성과 안전성에 대한 혼동은 약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우리는 종종 '안정된 삶'과 '안전한 삶'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안정된 삶이란 무엇일까? 안정된 직장, 안정된 가정, 안정된 생활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직장과 가정과 생활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뜻일 테다. 그 말은 곧 일상에서 예측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높은 예측 가능성은 삶에서의 불안을 줄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안정성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안정된 삶이 주는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안주하게 하고 새로운 도전을 꺼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안주하는 삶은 우리를 정체시키고, 때로는 우리가 더 큰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안전한 삶이란? 안전한 삶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보호받는 삶이다. 여기에는 물리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서적, 재정적 안전까지 다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위험이든 피하려고 하고 이는 당연한 본능이다. 문제는 과도한 안전 추구는 우리를 지나치게 위험 회피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어떤 한계 안에 가두게 될 수도 있다.


'안정성'과 '안전성'은 적어도 우리 삶에서는 무척이나 비슷한 의미를 가진 셈이다. 안정된 삶이 신체적, 정서적, 혹은 재정적 안전감을 줄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안정된 삶이 무조건 안전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안전함이 영구적인 안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안정적이라고 생각되던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크고 잘 나가는 대기업 혹은 글로벌 기업에서도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리 안정적이지도 그리고 안전하지도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안정된 직장에 있다 보면 한편으로는 안전함을 느끼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한때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였던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의 숫자가 요즘 들어 급감했다는 뉴스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입사 후에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찾아왔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안정적인 직장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내가 안정적인 환경 속에 안주하면서 점점 도태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안전감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감이 나를 감쌌다. '안정성'이 더 이상 '안전감'을 주지 못한 것이다.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때 주먹구구지만 나름 계산기를 두들겨보고서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남아서 따박따박 월급 받고 때 되면 승진해 가며 일하는 것과, 큰 빚을 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것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재정적으로만 따지면, 그리고 확률적으로 봤을 때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이후의 일은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안정성과 안전성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정답은 없다. 다만 안정성과 안전성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안전감을 느끼는 반면, 어떤 이들은 때때로 과감한 결정으로 안정성을 무너뜨릴 때 오히려 진정한 삶의 기쁨과 의미를 찾으며 정서적 안전감을 느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안정성과 안전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나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현명하게 조율하는 것이다.


(2024년 8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