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S (약물전달체계)
<1999-11-28>
“EPO DDS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특명이 떨어졌다. NESP가 상륙하는 마당에 제약사업부의 사활이 EPO DDS의 성공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나는 목요일 있을 DDS 추진 회의 자료를 준비하느라 어제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회사에서 9시를 맞았다.”
연구소의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연구과제는 단연코 EPO DDS였다. 참고로 'EPO'는 약물의 이름이고, 'DDS'는 여기에 적용하는 기술의 이름이다.
1980년대 후반에 Amgen이라는 미국의 바이오텍 회사가 EPO를 처음 개발했는데, 이 약은 우리 몸이 더 많은 적혈구를 만들 수 있게 도와준다. 콩팥에 이상이 생기거나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는 빈혈이 잘 생기기 때문에 EPO는 이런 분들에게 무척 중요한 약이다. EPO는 출시되고 나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Amgen은 글로벌 제약회사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내가 연구원으로 일하던 1990년대에 들어서 Amgen은 EPO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더 좋은 2세대 약의 개발에 돌입한다. 그것이 바로 NESP(혹은 Aranesp)라고 불리는 약이다. EPO는 효과는 좋은 반면 자주 (일주일에 2-3번 정도) 맞아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2세대 약인 NESP는 1주일에 한번 혹은 2주일에 한 번만 맞아도 되도록 개발 중이었다.
당시에는 우리 회사에도 자체 개발한 EPO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2세대 EPO 개발경쟁에 뛰어들어서 글로벌 제약회사를 앞지를 수만 있다면 우리도 세계적인 회사로 우뚝 설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있는 경쟁상대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동일한 전략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DDS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 입국심사관: 미국에는 무슨 일로 왔나요?
- 연구원: 학회 참석차 왔습니다.
- 입국심사관: 무슨 학회죠?
- 연구원: DDS에 관한 학회입니다.
- 입국심사관: DDS? 그게 뭐죠?
- 연구원: 아, 그건 Drug Delivery System이라는 뜻입니다. 제 전공이죠.
- 입국심사관: 당신이 drug delivery (마약 운송??) 전문가라고요?
- 연구원: 네, 맞습니다. 저는 drug delivery에 관심이 많습니다.
- 입국심사관: 당신을 연행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Drug delivery"는 일반인에게는 자칫 "마약운송"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일어난 웃픈 에피소드다. 사실인지는 믿거나 말거나다.
DDS (Drug Delivery System)는 번역하면 ‘약물전달체계’다. 여기서 말하는 “전달”이란 약을 ‘우리 몸속으로’ 투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약은 주사로 놓을 수 있고, 어떤 약은 먹거나 마실 수도 있고, 코로 흡입하거나 피부에 붙이는 방법도 있다. 각각의 전달 방법마다 장단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약이라 할지라도 어떤 약물전달체계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약의 효과가 더 커질 수도 있고, 부작용이 더 적어질 수도 있고, 사용편의성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각의 약물마다 그 특성에 잘 맞는 최적화된 악물전달체계를 찾고 만들어서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DDS 기술은 약물 자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발된 약물에 대한 최적의 전달방법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신약개발에 비해서 돈이 적게 드는 반면 개발의 성공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편이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바이오 제약회사들은 신약개발에 도전하는 대신 DDS 개발에 먼저 뛰어들었고 실제로 많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DDS 기술로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회사가 한미약품이다. 한미는 2010년대 중반에 글로벌 제약회사 6곳에 연거푸 큰 금액의 기술수출을 성사시키며 한국 제약산업의 연구력을 세계에 드높였다. 최근에는 알테오젠이라는 회사가 단연 돋보인다. 2024년 9월 기준, 기업가치 17조 원으로 코스닥 시총 1위로 올라선 알테오젠의 핵심기술 역시 DDS 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 (2023년 매출액 33조 원) '키트루다'에 이 기술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향후 엄청난 판매로열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주가상승의 이유다. 많은 항암제들은 병원에서 주사로 1시간 가까이 맞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 향상된 DDS 기술을 적용하면 투여시간이 10분 이내로 줄어들어든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늘 양복점을 운영했다. 1급 기능사 자격을 가지셨던 아버지와 양장 기술을 가진 어머니께서 부산 변두리에서 맞춤 양복점 ‘미장라사’를 운영하셨다. 손님이 오시면 아버지는 손수 줄자로 손님의 허리둘레, 팔길이 등을 꼼꼼히 재고, 어머니가 그것을 종이에 받아 적곤 하셨다. 그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기업에서 대량 생산한 기성복이 점차 인기를 얻었고, 결국 맞춤 양복은 조금씩 설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는 가게를 접으셔야 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삶도 마치 기성복 같은 면이 있었다. 사회는 이미 정답이 정해진 길을 누가 더 실수 없이 잘 따라가느냐가 성공의 척도라고 여겼다. 학교에서는 그저 주어지는 학과목을 공부하고 그 성적에 따라 대학과 전공이 정해지고 진로까지 결정되었다. 마치 기성복을 입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이미 누군가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정답’이 정해진 시대가 아니다. 기성복 같은 ‘레디메이드(ready-made)' 인생에 나를 불편하게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진 사람,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었다. 같은 약물도 전달방식에 따라 그 성능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재능과 잠재력도 어떻게 표현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약도 인생도, 개성과 각각의 특성에 맞게 맞춤형으로 최적화되어야 한다. 정해진 틀에 자신을 가두려 하지 말고 오히려 다양한 경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인생을 디자인해야 한다. 자신만의 삶의 궤적을 ‘맞춤형’으로 그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2024년 9월)